세계의 독립운동
필리핀 독립운동사
— 글. 박준병(강원대학교 사학전공, 강사)
호세 리살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호세 리살Jose Rizal, 1998』
에밀리오 아기날도(1827~1922)
16세기부터 스페인의 지배를 받던 필리핀인은 19세기 중반부터 유럽에서 전해진 자유주의 사상을 통해 자신만의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스페인의 지배 아래에 다른 지역적 문화와 언어로 나뉘어져 있던 필리핀인은 점차 자신들을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인식하기 시작했다.(스페인에서는 필리핀 원주민을 인디오로, 필리핀에서 태어난 스페인인을 필리핀인이라고 구분하고 있었다.) 필리핀인은 스페인에 식민 정부의 인디오 차별과 강압적 지배에 대한 다양한 개혁을 요구하였고, 이를 프로파간다 운동Propaganda Movement이라고 한다.
프로파간다 운동의 중심에는 호세 리살Jose Rizal이 있었다. 의사이자 작가이기도 했던 리살은 1887년과 1891년 각각 『나를 만지지 마라Noli Me Tangere』, 『혁명El Filibusterismo』이라는 작품으로 필리핀인의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있었다. 리살과 프로파간다 운동 동지들은 필리핀과 유럽에 걸쳐 다양한 선전 활동을 통해 스페인의 강압적 식민 지배 실상을 알렸고, 이를 시정해 달라고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페인의 대응은 필리핀인에 절망을 안겨주었다. 스페인은 리살을 반체제 인사로 규정해 그를 체포한 이후, 프로파간다 운동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리살의 체포와 프로파간다 운동의 실패로 스페인에 대한 필리핀인 저항운동의 성격은 급격하게 변했다. 유럽 유학과 같은 고등 교육을 받은 엘리트 중심으로 자치권을 요구했던 프로파간다 운동 대신에 안드레스 보니파시오Andress Bonifacio와 같은 도시 노동자·농민 계층을 중심으로 결성했던 ‘카티푸난Katipunan’이 무장투쟁을 통한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며, 필리핀인의 저항운동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열악했던 무기와 보급으로 인해 1896년 8월 시작했던 카티푸난의 봉기는 처음부터 큰 어려움에 직면했고, 보니파시오가 이끄는 필리핀 독립 세력은 계속 스페인 군에 패배하였다. 하지만 마닐라 남부 카비테Cavite 지역에서는 달랐다. 에밀리오 아기날도Emilio Aguinaldo가 이끌던 일단의 군대가 성공적으로 키비테와 인근 지역을 장악했다. 하지만 이런 성공의 순간은 잠시였다. 곧 카티푸난 지도층 내부는 보니파시오를 중심으로 했던 파벌과 아기날도가 이끌던 파벌로 분열했고, 그 과정에서 1897년 5월 보니파시오는 처형되었다. 이런 지도부의 분열은 본질적으로 카티푸난의 급진성을 경계했던 많은 필리핀 엘리트 계층의 우려에 따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온건파 엘리트를 중심으로 필리핀 저항세력은 무장투쟁의 한계를 인식했고, 스페인과의 협상을 통해 아기날도 등 지도부가 1897년 12월 홍콩으로 망명하면서 스페인에 대한 필리핀인의 독립운동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미국-필리핀 전쟁 중 필리핀 독립군의 영웅이었던 그레고리오 델 필라Gregorio del Pilar 장군의 활약을 다룬 영화 『고요: 소년 장군Goyo: Ang Batang Heneral, 2018』
필리핀 과도정부 대통령을 지냈던 마누엘 케손(1862~1944)
1898년 지구 반대편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상황이 발생하며, 필리핀 독립운동에 새로운 국면이 열리게 되었다. 쿠바의 독립을 둘러싸고, 미국과 스페인의 갈등이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다.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스페인 군의 견제를 위해 태평양에 있는 스페인 식민지 필리핀을 공격하고자 했다. 그리고 사전작업으로 아기날도와 접촉하여 협력 가능성을 타진했다. 아기날도 등은 미국과의 협력이 필리핀 독립에 새로운 기회가 될 것이라는 희망에 적극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손쉽게 마닐라 스페인 군을 제압했던 미국은 필리핀에 대한 식민화에 나서며, 필리핀을 배신했다.
미국의 배신에 필리핀인은 다시 그들과의 전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1899년에 시작했던 미국-필리핀 전쟁의 와중에 필리핀인은 아기날도를 중심으로 ‘필리핀 제1공화국’을 수립하며, 독립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다시금 확인하였지만, 많은 필리핀 엘리트가 미국에 협조하면서 아기날도 진영을 이탈하기 시작했다. 결국 1901년 3월 아기날도가 미군에 체포되고, 루손섬 바탕가스Batangas 지역에서 미국에 끝까지 저항하던 필리핀 독립 세력 군대가 1902년 4월에 항복하면서 필리핀은 이제 새로운 지배국 미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식민화 초기, 미국의 엄격한 통제에 필리핀 독립에 관한 움직임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독립에 대한 필리핀인의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미국의 감시를 피해 꾸준히 민족 독립의 열망을 유지했던 이들은 1907년 개원했던 ‘필리핀 의회Philippine Assembly’를 통해 공개적으로 필리핀 독립에 대한 논의를 재개했다. 미국 역시 독립에 대한 필리핀인의 요구를 일정 정도 수용해 주며, 필리핀인에게 식민지 운영 권한 일부를 부여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여전히 미국은 필리핀의 식민지였고, 필리핀인은 미국의 지배권을 존중해야만 한다는 것이 미국의 태도였다.
자치권, 독립과 같은 사안에서 식민 지배국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견해차는 결코 해소할 수 있는 성질의 문제가 아니었다. 1920년대 필리핀에서는 이를 둘러싼 미국인 총독과 필리핀인 간 갈등이 전면적으로 폭발하였다. 필리핀인은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에게 자신의 불만을 전달하기도 했지만, 미국 정부는 미국인 총독에 대한 지지 의사를 밝히기만 했다. 이런 미국의 태도에 실망했던 필리핀인은 점차 양측 갈등의 근본적인 해결책은 독립밖에 없음을 깨닫기 시작했다.
마누엘 케손Manuel L. Quezon을 중심으로 필리핀 민족지도자들은 지속해서 미국을 방문하여 미국 정치권에 독립에 대한 필리핀인의 열망을 알리며, 그들을 설득했다. 또한 선제적으로 독립을 위한 조건을(비록 그 조건이 필리핀에 상당한 손해를 끼치는 것이었음에도) 미국에 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미국은 필리핀 식민화 이후부터 여전히 필리핀인은 독립·자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미국의 호의적인 보호와 교육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사회 여러 방면에서 필리핀 독립의 필요성을 알리며, 필리핀인의 노력은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1929년 미국에서 발생했던 대공황Great Depression은 이런 필리핀인의 노력에 호응해 주듯이 필리핀 독립에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대공황으로 인해 생활이 어려워졌던 미국인 중 상당수가 필리핀인과 필리핀산 수입품이 자신들을 더 어렵게 하고 있다며, 필리핀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인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었던 미국 의회도 1930년부터 본격적으로 필리핀 독립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934년 「필리핀 독립법」이 제정되면서 필리핀은 미국의 보호를 받는 자치정부 수립 이후, 10년 뒤 독립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스페인의 식민 지배 이후 약 350년 만에 민족의 독립을 확약받은 순간이었다.
「독립법」 통과 이후, 필리핀은 10년 뒤의 상황을 준비하기 위해 과도정부를 구성했고, 대통령으로는 케손이 선출되었다. 하지만 과도정부가 마주한 현실은 험난하기만 했다. 주권국으로서 국가와 국민을 보호할 국방력을 키워야 했고, 국가의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한 경제 정책도 세워야 했다. 오랜 기간 식민 지배를 거치며 고착했던 빈부격차와 같은 사회 불평등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단기간에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는 아니었고, 많은 부분에서 과도정부는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과도정부에 1941년 예상하지 못했던 커다란 위협이 발생했다.
필리핀 게릴라와 미군의 저항 활동을 보여준 필리핀 국기) 헐리웃 영화 『백 투 바탄Back to Bataan, 1945』
1946년 7월 4일 필리핀 독립 선포 과정에서 국기 게양 장면(내려가는 성조기와 올라가는 필리핀 국기)
1941년 12월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공습한 직후, 필리핀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침략에 필리핀은 속수무책이었고, 케손 등이 일본의 침략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면서 필리핀인이 어렵사리 수립했던 과도정부는 붕괴했다. 필리핀을 점령했던 일본은 효과적인 지배와 필리핀인의 협조를 얻으려 필리핀을 독립시켜 주었지만, 이는 겉모습이었을 뿐 괴뢰정부를 통해 필리핀을 통제하고 있었다. 한편, 케손과 같이 망명하지 않았던 필리핀 정치인 상당수는 일본의 강압으로 때로는 스스로 일본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필리핀인 전부가 일본의 지배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의 필리핀 점령 뒤에도 남아있던 미군 일부와 함께 농민, 노동자, 그리고 도시 중간계층 등 ‘보통’ 필리핀인이 게릴라 전투를 통해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들 필리핀 게릴라는 일본부대 습격, 전쟁 포로 구출, 그리고 미국에 군사정보 전달 등과 같은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이 얼마 남지 않았던 1944년 10월 미국은 필리핀을 다시 일본으로부터 탈환하였다. 1942년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필리핀을 방어했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다시 돌아오겠다I Shall Return.”라고 말한 지 약 3년 만이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필리핀 지도자급 인사들이 미군과 함께 귀환하면서, 과도정부 역시 재수립되었다. (케손은 미국이 필리핀을 탈환하기 얼마 전 병으로 사망한 상태였다.)
필리핀 탈환 이후, 과도정부가 마주한 필리핀, 특히 마닐라의 상황은 참담했다. 필리핀의 중심지였던 마닐라는 도시의 80%가 파괴되었다. 미군의 마닐라 탈환 당시 발생했던 미군의 공습과 일본군의 학살로 인해 인명피해도 엄청났다. 이런 상황에서 필리핀은 독립을 맞이했다. 물론 미국이 의지만 있었다면, 원래 약속했던 시점보다 필리핀의 독립을 늦출 수도 있었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의 새판을 짜려 했던 미국에 필리핀 문제는 중요한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미국과의 약속대로 필리핀은 독립을 맞이했다. 하지만 이들 앞에 놓인 것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국토, 전후 재건을 위해 독립했음에도 이전 지배국이었던 미국에 의존해야 하는 모순적인 상황, 그리고 냉전이라는 새로운 세계 질서에 대한 적응과 오랜 식민 지배 과정에서 고착했던 다양한 사회문제의 해결이라는 험난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1946년 7월 4일, 주권 국가로서 필리핀 제3공화국의 출범은 독립을 위해 오랜 기간 노력했던 필리핀인에게 민족적 성취감과 앞으로 그 어떤 역경도 극복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필리핀에 상륙하는 맥아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