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인물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가족들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역사학과 부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정청 엽서(1919. 10.)
1919년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 임시의정원 의원 선출 방식은 정치 상황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바뀌었다. 처음으로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은 1919년 4월 25일 「임시의정원법」 제정 때였다. 당시 상하이上海에 모인 인사들 중에서 8도 출신별로 약 30명을 대표로 선출했으며, 의원 자격은 만 23세 이상, 중등 교육 이수자로 제한했고 임기는 2년이었다. 같은 해 9월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하며 의원 수와 활동 범위가 확대되고 운영 규정이 세분화되었으며, 임기 제한은 폐지되었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후 1925년 헌법 개정으로 의원 선출 방식은 간접선거제로 바뀌었고, 상하이 대한인민단이 지방의회 역할을 맡아 의원을 간접 선출했다. 1927년 이후 임시정부 기능이 약화되고 파벌 갈등이 심화되자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전환되었으며, 한국독립당(1930), 한국국민당(1935) 등 정당이 중심이 되어 임시의정원을 운영했다.
1939년 치장綦江으로 이동 후 의회가 재편되면서 의원 수가 35명으로 늘었고 다당제로 전환되었다. 1940년 5월 세 정당이 합당해 새로운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자 임시정부는 이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같은 해 10월 헌법 개정으로 집단지도체제에서 단일지도체제로 바뀌고 주석제가 도입되었으며, 좌익 인사들도 선출되어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또한 의원 피선거권 연령이 만 25세에서 만 18세로 하향되었다.
1942년 8월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규정’이 제정되면서 선거권과 피선거권은 임시정부 법령을 준수하는 자로 제한되었고, 피선거권은 일정한 독립운동 경력이 있는 자에게만 주어졌다. 선거 주체는 충칭에 거주하는 동포들로 사실상 제한되었으며, 같은 해 9월 좌익 세력이 합류해 의회는 여당(한국독립당)과 야당(민족혁명당)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헌법 개정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어 1943년 10월부터 1944년 4월까지 장기간 회의가 이어졌다. 그 결과 야당 몫으로 부주석을 신설하고 김규식을 임명했으며, 국무위원 수를 확대해 좌우연합정부를 구성하기로 했다. 선거구 개편은 무산되었으나, 피선거권 연령을 다시 만 25세로 높이고 의원 자격을 3년 이상 독립운동에 전념한 인물로 강화했다. 임기는 3년으로 하고 연임을 허용했으며, 한국광복군 대표를 당연직 의원으로 포함시켰다.
임시의정원은 실질적으로 27년 간 운영되면서 여러 번 선거 방식이 바뀌었는데, 의원들 중에는 가족 관계로 함께 의원이 된 사례도 적지 않았다. 임시정부가 중국에서 활동하였기 때문에 인력풀이 넓지 않아, 독립운동가 가문들이 세습적으로 활동한 경우가 많았기에 의원들 가운데는 부부·형제·부녀 관계가 모두 나타났다. 이를 유형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부부의원이 된 대표적인 사례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김철(1886~1934)과 최혜순(1900~ 1976) 부부이다. 김철은 1917년 상하이로 망명해 1918년 신한청년당을 창립하고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서 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교통차장, 법무장, 군무장 등 국무위원, 상하이 대한교민단장 등 요직을 맡았다. 그는 1927년 3월 최혜순과 결혼했는데, 당시 그녀는 상하이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 중이었다. 최혜순은 결혼 후 임시정부 청사 근처에 혜생의원을 열고, 한인애국부인회 집사장으로 활동하며 3·1운동 기념 인쇄물 제작과 만보산 사건 수습 등에서 활약했다. 그 공로로 1931년 전라도 의원으로 선출되어 1933년까지 활동했다. 이후 그녀는 1934년 김철이 병사하자 1937년 세 자녀와 함께 광주로 귀향했다.
두 번째 경우는 김관오(1901~1965)와 방순희(1904~1979)이다. 김관오는 1919년 보성중학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된 뒤, 1921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1924년 윈난강무학교雲南講武學校를 졸업한 후 중국군에서 복무했고, 1938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그는 1940년 임시정부 군사위원으로서 한국광복군 창설의 기반을 마련하고 광복군 활동에 참여했다. 1941년경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 중이던 방순희를 만나 결혼하였다.
방순희는 연해주에서 성장했으며 서울 정신여학교 졸업 후 다시 연해주로 돌아가 교사로 일했다. 1925년 귀국 후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되었고,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이후 독립운동가 현익철(1890~1938)과 결혼했다. 하지만 1938년 5월, 현익철이 남목청 회의 도중 공산주의자 이운한에게 암살당하면서 홀몸이 되었다.
홀로 아들을 키우던 방순희는 1939년 10월 치장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대對 소련 전문가이자 선전원으로 활동하며 좌우익 대립을 넘어서 광복진선운동에 공헌한 점을 인정받아 의원이 된 것이다.
이후 1942년 10월, 김관오 역시 중국군과 임시정부를 연결하는 군사·외교 통로 역할을 수행할 잠재력을 인정받아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면서 두 사람은 부부 의원이 되었다. 김관오는 의정원 회의에 직접 참여해 발언하기보다는 군사 대표 의원으로서 광복군의 작전 보고, 중국군과의 협력 협정 보고, 군사비 및 보급 예산 확보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형제가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한 사례는 이회영(1867~1932)·이시영(1869~1953) 형제와 조소앙(1887~1958)·조시원(1904~1982) 형제 두 경우가 있다.
먼저 이회영과 이시영은 1911년 다른 형제들과 함께 서간도 유하현 삼원포로 망명해 경학사와 신흥강습소를 세우며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했다. 그러나 재정난과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이회영은 1913년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운동 전략을 논의했고, 1914년에는 비밀리에 귀국해 군자금을 모으고 고종의 망명을 추진했다. 그러나 고종의 서거로 계획이 무산되자, 1919년 2월 베이징北京으로 망명했다. 이후 그는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소식을 듣고 상하이로 가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으나, 외교 중심 노선을 반대하고 무장투쟁을 주장하며 두 달 만에 베이징으로 돌아갔고 이후에는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운동에 헌신했다.
이시영은 1913년 일제의 암살 위협을 피해 펑톈奉天과 베이징으로 피신했으며, 형과 함께 고종 망명을 추진하기도 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해 형과 함께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고, 이후에도 꾸준히 임시정부에 남아 의원과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며 정부 운영에 힘썼다.
다음으로 조소앙은 일본 유학 후 국내에서 활동하다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해 동제사, 신한청년당 등에서 활동했다. 1917년 1월 ‘대동단결선언’, 1919년 2월에는 지린吉林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3·1운동 이후 그는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헌장 초안을 작성하며 처음으로 ‘임시의정원’이라는 명칭을 사용했고,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참여했다. 이후 김규식과 함께 파리로 건너가 외교 활동을 펼치고, 1919년 7월경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외교와 이론 정립에 핵심 역할을 담당했다.
조시원은 1920년 2월 형이 활동하던 상하이로 건너가 남방대학 부속 중학교와 대학에서 수학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상하이, 서간도,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고, 1933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했다. 1938년에는 통합 한국독립당의 중앙상임위원, 비서부장, 조사부장, 조직부장, 선전부장 등을 맡으며 책임을 다했다. 그 공로로 그는 1938년 10월 열린 임시의정원 제31회 회의에서 의원 겸 비서장으로 선임되었고, 이후 의원자격 심사위원, 임시정부 선전위원·특파원·선무단장 등으로 활약하며 임시정부의 운영을 지원했다.


의원당선증서 신정완(1943. 10.)

부녀 의원이 된 경우는 신익희(1894~1956)와 신정완(1916~2001), 김붕준(1888~1950)과 김효숙(1915~2003) 등이다. 신익희는 일본 유학 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다가 1919년 3·1운동을 주도한 뒤 3월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참여,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이후 임시정부 내무부차장을 지냈으나 1922년 말 임시정부를 떠나 중국 국민당군에 들어갔다. 1931년 난징南京에서 한국혁명당을 창당하며 다시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섰고, 1932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1933년 신한독립당, 1935년 조선민족혁명당 창당 등 민족통일전선 운동을 주도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에는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해 항일투쟁에 참여했으며, 1939년 한국혁명운동통일7단체회의에도 참석했다. 그러나 단체 통합이 무산되자 조선의용대가 있던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에서 활동하다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일부가 광복군에 편입될 때 9년 만에 임시정부에 복귀했다.
신정완은 1922년 말경 모친 이승희와 오빠 신하균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고, 부친 신익희가 활동하던 임시정부 속에서 성장했다. 1937년, 15세의 나이로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해 독립운동을 시작했고, 1939년부터는 임시정부가 파견한 산동성 제2전구 사령부 공작원으로 활동했다. 1941년 임무를 마치고 충칭重慶의 임시정부로 돌아왔으며, 1943년 10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어 해방까지 활동했다.
두 번째 사례로, 김붕준은 보성중학교 졸업 후 1919년 3·1운동 직후 상하이로 망명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20년에는 임시정부 군무부원, 임시의정원 의원과 비서장 등으로 활동했다. 1924년 상하이 법정대학을 졸업한 뒤, 1928년 상하이 대한인교민회 5대 단장, 1930년 인성학교 교장, 한국독립당 간부로 활약했다. 1933년에는 한중 양국의 항일전쟁에도 직접 참여했으며, 1934년 임시의정원 상임위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1935년에는 한국국민당 간부로 활동하고, 1938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장을 맡았다. 1939년에는 임시의정원 의장으로 선출되어 1941년 10월까지 광복군 활동 지원과 법적 승인, 그리고 조선민족혁명당 인사들을 의정원에 참여시켜 독립운동 진영 통합에 기여했다.
그의 딸 김효숙은 1921년 어머니와 오빠, 동생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가 그곳에서 성장했다. 상하이에서 중등학교를 마치고 1937년 광저우廣州 중산대학에서 수학했으며, 졸업 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상해어, 광동어, 북경어 등 여러 언어에 능통하여 부친의 통역을 맡았다. 1938년에는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에서 선무공작을 펼쳤고, 1939년 한국독립당에 가입한 뒤 한국혁명여성동맹을 조직했다. 1940년에는 여성 동지들과 함께 광복군에 입대했으며, 1941년 10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신정완 가족사진. 왼쪽부터 남편 김재호, 시아버지 김복현, 차남 김유생. 신정완과 김재호는 모두 임시의정원 의원을 역임한 부부 의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