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메뉴버튼 퀵메뉴버튼 최상단으로 가기

특집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

특집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

— 글. 한시준(단국대학교 명예교수)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대한민국 임시헌장(1919. 4.)

한국민족은 반만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민족의 역사를 변화 발전시킨 사건과 계기들이 수없이 많았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도 그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난’을 ‘조선역사상 1천년래 제1 대사건’이라고 했다. 묘청의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기상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일까?
20세기에 들어와 민족의 역사를 크게 변화 발전시킨 계기가 있었다.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였다. 1919년 4월 10일 밤 10시부터 11일 오전 10시까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민족의 역사를 180도로 완전히 바꾸어 놓은 민족사의 대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임시의정원 설립

1919년 3월, 국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중국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상하이로 모여든 데는 이유가 있었다. 1919년 3월 1일 발표한 독립선언 때문이었다. 독립선언을 통해 우리 민족은 ‘독립국’임을 대내외에 선포하였다. 당시는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식민지지배를 받고 있던 때였다. ‘독립국’이라고 하였으니, 독립국을 세워야 했다. 독립국을 세우기 위해 많은 인사들이 상하이에 모인 것이다.
상하이는 만주·연해주·미주 등과 더불어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대한제국 군인 출신인 신규식이 망명하여 중국의 혁명인사들과 교류하며 터전을 마련하였다. 젊은 청년들을 비롯하여 박은식·신채호 등 주요 인사들의 망명이 이어졌다. 이들이 동제사라는 단체와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활동하면서 독립운동 거점이 되었다. 1917년에는 신규식·박은식·조소앙 등이 임시정부 수립을 제창하는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면서, 상하이가 해외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신한청년당의 역할도 컸다. 신한청년당은 여운형·김철 등이 조직한 단체로, 파리강화회의를 독립운동의 주요한 기회로 포착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한 것이다. 그리고 국내·일본·만주·연해주 등에 당원들을 보내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알리고, 주요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을 종용하면서 상하이로 모일 것을 요청하였다.
많은 인사들이 상하이로 왔다. 국내에서 현순·최창식·신익희 등, 만주와 연해주에서 이동녕·이시영·김동삼·조소앙 등, 베이징에서 이회영·조성환 등, 일본에서 이광수·최근우 등, 미국에서 여운홍 등이 상하이로 집결한 것이다. 3월 말 상하이에 모인 인사들이 약 1천 명에 이르렀다.
상하이에 모인 인사들은 독립국과 임시정부 수립에 관한 문제를 논의하고 준비했다. 논의과정에서 다양한 의견들이 대두되었다. 독립국의 이름인 국호에 대해 ‘대한’, ‘고려’ 등이 제기된 것을 비롯하여, ‘정부’보다는 ‘당’을 조직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또 상하이에 모인 인사들이 주도하여 정부를 수립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3·1운동을 주도한 국내 인사들의 의사를 먼저 확인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다양한 의견들이 제기되었지만, 여러 차례 회합을 거듭하면서 점차 조정되어 갔다. 의견이 조율 정리된 것은 4월 8일이었다. 신규식·조소앙·현순 등 8인위원회를 구성하여 논의를 정리한 것이다. 국호 문제를 비롯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그리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먼저 임시의정원을 설립한다는 것, 의장은 이동녕이 맡는다는 것, 정부의 조직은 총리제를 채용한다는 것 등도 결정하였다.
논의가 정리되면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4월 10일 밤 10시 프랑스조계 찐션푸로에 있는 양옥집에서 열렸다. 참석한 인원은 모두 29명이었다. 회의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29명이 모인 모임의 명칭이었다. 조소앙이 ‘임시의정원’으로 할 것을 제안하여 가결되었다. 이어 의장 이동녕, 부의장 손정도, 서기에 이광수와 백남칠을 선출하였다. 이로써 임시의정원이 설립되었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고, 곧바로 제1회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는 의장으로 선출된 이동녕의 사회로 진행되었다. 사전에 논의하고 준비한 과정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제1회 회의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기사록」이란 이름으로 기록해 놓았다. 회의에서 결정한 것은 모두 4가지였다.
가장 먼저 결정한 것은 국호였다. 3·1독립선언을 통해 ‘독립국’임을 천명하였고, 그 독립국의 이름을 정한 것이다. 신석우가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칭하자”라고 동의하였고, 이영근이 재청하면서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이란 이름의 국가가 새롭게 탄생했다.
두 번째로 결정한 것은 관제였다. 관제는 정부의 조직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행정수반의 명칭은 무엇으로 하고, 행정부서로 어떤 기구를 설치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행정수반의 명칭은 국무총리로 결정되었다. 행정부서는 내무·외무·법무·재무·군무·교통 등 6개 부서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세 번째로 국무원을 선출했다. 국무원은 관제를 통해 정해진 국무총리를 비롯하여 6개 행정부서 책임자를 말한다. 국무원 선출은 의원들이 구두로 추천하고, 추천된 인사들을 대상으로 무기명 단기식 투표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국무총리에 이승만·안창호·이동녕 등 3인이 추천되었고, 투표결과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이어 내무총장(안창호), 외무총장(김규식), 법무총장(이시영), 재무총장(최재형), 군무총장(이동휘), 교통총장(문창범) 등 행정부서 책임자를 선출했다.
네 번째로 헌법을 제정하여 통과시켰다. 헌법은 조소앙이 기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익희·이광수·조소앙 3인을 심사위원으로 선정하여 초안을 심사하였고, 회의에서는 초안의 일부를 수정해 가결하였다. 헌법의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라고 했다.
회의를 마친 것은 4월 11일 오전 10시였다. 12시간에 걸친 회의를 통해 임시의정원을 설립하고, 국호·관제·국무원 선출·헌법 제정 등을 결정한 것이다. 이로써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국가를 건립하고, 국무총리를 행정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이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1919년 4월 11일 수립되었다.

역사적 가치와 의의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는 민족의 역사를 크게 변화 발전시킨 대사건이었다. 회의에서 결정된 것들이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바꾸어 놓았고, 180도로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그렇다. 정리하면 크게 4가지다.

하나, ‘대한민국’이란
새로운 국가를 건립하였다.


한국민족의 역사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한 이래 나라가 망하면 다시 나라를 세우면서 반만년을 이어오고 있다. 고조선 → 부여 → 고구려·백제·신라 → 고려 → 조선 → 대한제국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대한제국이 1910년 일제의 침략으로 망했다. 대한제국을 이어 대한민국이란 나라를 건립한 것이다.

둘, 군주주권의 역사를
국민주권의 역사로 바꾸어 놓았다.


반만년 역사의 대부분은 군주가 주권을 행사하는 군주주권의 역사였다. 고조선에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주권은 군주가 갖고 있었다. 대한민국을 건립하면서, 국민이 주권을 갖는 국민주권의 역사로 변화된 것이다.
대한민국은 국민이 주권을 갖는 나라를 말한다.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한 이유를 밝혀놓은 게 없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에서 ‘제’자만 ‘민’자로 바꾼 것이라 생각된다. 대한제국과 대한민국의 정확한 나라 이름은 ‘대한’이다. 대한제국은 ‘대한’이란 나라에 황제가 주권을 갖는다는 것이고, 대한민국은 ‘대한’이란 나라에 국민이 주권을 갖는다는 말이다.

셋, 전제군주제 역사를
민주공화제 역사로 바꾸어 놓았다.


군주가 주권을 행사하는 정치형태를 전제군주제라고 한다. 고조선에서부터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반만년 역사의 대부분은 군주가 주권을 행사했던 전제군주제 역사였다.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헌장」이란 헌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그 제1조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이라 되어 있다. 전제군주제의 역사가 사라지고, 새로운 민주공화제의 시대를 연 것이다.

넷, 국민의 대표기구이자
입법기관의 명칭을 ‘국회’라고 하였다.


각 나라마다 국민의 대표기구이자 입법기관을 일컫는 명칭이 다르다. 미국은 상원·하원, 일본의 참의원·중의원, 중국은 최고인민대표회의라고 부른다. 우리는 ‘국회’라고 한다. ‘국회’라는 명칭은 누가 언제 정한 것일까. 흔히 1948년 5월 31일 개원한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결정해 놓았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0조에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했다. 당시는 임시의정원이라고 했지만, 독립이 되면 명칭은 ‘국회’로 한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1910년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반만년 역사의 대부분을 군주주권과 전제군주제에서 살아왔다. 현재 우리는 대한민국이란 국가에서, 국민이 주권을 행사하며, 민주공화제 시대에 살고 있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통해 군주주권의 역사를 국민주권의 역사로, 전제군주제의 역사를 민주공화제의 역사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민족의 역사를 180도 변화시킨 민족사의 대전환이었다.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큰 제1 대사건이라고 할만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그날’ 써클 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