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자료
임시의정원 의장이 간직하고자 했던 ‘발자국’오산 이강의 ‘설니홍조雪泥鴻爪’
— 글. 이홍구(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사)
기념관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기념일을 맞아 기념관 자료 중 의미있는 자료를 소개하는 기사를 작성하게 되었다. 여러 자료를 살펴보는 중 ‘설니홍조雪泥鴻爪’라는 매우 흥미로운 제목의 노트 두 권을 발견하였다. ‘설니홍조’는 도대체 무슨 뜻일까? 게다가 제목 아래에는 생소한 이름이 적혀 있다. 그 이름은 ‘이오산李吾山’, 흔한 이름이 아니다. 이 노트는 누가 어떤 걸 쓴 것일까? 노트와의 인연은 이러한 의문들에서 시작되었다.
노트의 주인부터 알아보자. 답부터 말하자면 ‘오산’吾山이란 호를 가지고 있는 이강李剛이다. 그러면 이강은 누구인가? 노트 내용을 보기 전에 이강이란 인물부터 살펴보자.
이강은 1878년 4월 18일 평안도 용강에서 태어났다. 본명 이정래李正來이다. ‘이강’이란 이름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동공보 주필로 활약할 때 사용한 필명이었는데 이 이름을 사용한 이후로 본명이었던 정래 대신 더 많이 불려지게 되었다고 한다. 호는 오산吾山 또는 오산鰲山이다. ‘설니홍조’에는 그에 대한 호칭을 모두 吾山이라고 적고 있다.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집안이 모두 기독교에 입교하면서 같이 입교한 뒤 하와이 이민자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1903년 하와이로 건너가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일하다 1년 뒤 미국 본토로 건너간다.
샌프란시스코로 들어가서는 소중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바로 도산 안창호였다. 이강은 안창호와 함께 리버사이드의 오렌지농장에서 일하던 한인들과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초기 한인 이민사회를 이끌어갔다.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한인 조직인 공립협회 설립을 주도하였고, 리버사이드지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한인들을 위한 여러 활동을 지도하였다.
1907년 공립협회 원동위원으로 임명되면서 한국을 거쳐 1908년 3월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갔다. 이 곳에서 《해조신문海潮新聞》의 편집인으로 활동하다 신문이 폐간되자 이를 계승해 창간한 《대동공보大東共報》 주필로 항일 언론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09년 안중근 의거의 계획과 실행을 도와 활약하면서 그의 정신을 널리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3.1운동을 전후하여 연해주와 국내를 오가며 활동하던 이강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인연을 갖게 된 시기는 1923년이었다. 러시아 노농정부가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을 포함한 민족운동을 불허하면서 상하이로 건너가게 된 것이다. 때마침 상하이에는 미주에서 함께 한인 사회를 이끌었던 안창호가 활동하고 있었다. 상하이에서는 여러 일을 맡아 활동하였다. 흥사단에 입단하여 원동임시위원부 통상단원으로 활동하였고, 상하이 민단 의사원으로 당선되기도 하였다.
이강은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상하이에 온지 4년 만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장에 올랐다. 일본 외무성 문서에 따르면 그는 이미 1925년 이승만의 임시대통령 면직 시 하와이 대표 의정원 의원으로서 임시의정원 회의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26년 12월 23일부터 4일간 잠시 부의장에 임명되었다가 1927년 4월 8일부터 시작된 제20차 임시의정원 회의 기간 중인 5월 6일 임시의정원 의장에 올랐다. 제3차 헌법 개정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약헌이 제정된 이후 전임이었던 이동녕이 사임하면서 의장 자리에 오른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약헌이 시행되면서 임시정부의 체제가 국무령제에서 국무위원제로 바뀌는 중요한 시기인 만큼 임시의정원 의장을 맡은 이강의 역할 역시 중요했다.
그러나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의 재임기간은 길지 않았다. 이강은 안창호가 구상했던 이상촌 건설을 위해 임시정부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그러던 중 1928년 푸젠성福建省 샤먼廈門의 중국인 교회에서 강연하다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고, 평양으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렀다. 1930년 9월 만기 출옥 후 고향 용강에 거주하다가 1934년 타이완을 거쳐 다시 중국으로 건너갔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푸젠성 취안저우泉州에 정착하였다. 진장晉江에 있는 한 학교에서 영어교사를 하며, 여러 해 동안 수년간 중국인 제자들을 길러낸 것이다. 그 와중에도 독립운동에 대한 끈은 놓지 않았다.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 징모 임무를 띠고 닝안永安·난핑南平·젠양建陽 등을 다니며 광복군 모병활동을 하였다. 광복 직후 상하이로 건너간 뒤 1946년 외교부 특파원 자격으로 타이완臺灣에 건너가 한국 동포의 안전 귀환을 위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7년 귀국한 뒤 흥사단 본부 심사부장을 지냈고, 6.25전쟁 직후에는 서울 남산고등학교 교장을 지내며 육영사업에 매진하다 1964년 10월 13일 지병으로 인해 생을 마감하였다.
‘설니홍조’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을까? 대략적인 내용은 이강이 활동하던 지역의 지인들이 선생에게 보내는 헌사와 서명에 대한 기록이다. ‘雪泥鴻爪’라는 단어의 뜻을 보면 왜 이 글을 받았을까 라는 의문이 풀린다. ‘눈 위의 기러기 발자국’은 눈이 녹으면 곧 사라진다. 분명히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디에도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인생무상이라지만 그 와중에서도 눈 녹듯 없어지게 되는 지인들과의 관계를 오랫동안 간직하려는 그의 생각이 담겨있는 것이 ‘설니홍조’였던 것이다.
‘설니홍조’는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2권의 노트로 구성되었다. 1권은 중국 체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자신을 포함한 73인의 글이, 2권은 1947년 이후 한국에서 작성된 것으로 6인의 글이 수록되어 있다.
1권 첫 부분은 오산이 1944년 8월 25일에 쓴 중문 서언이다.
나는 한국 혁명당의 일원으로 40여 년간 줄곧 해외에서 혁명 활동을 하였다...... 1937년 우리 스승 안창호 선생께서 다시 감옥에 수감된 후 결국 의로운 생을 마감하셨다. 그후 환경의 열악함에 무한한 비애를 느끼고 나는 이곳에 도착하여 휴양소로 삼았다...... 그 사랑과 보살핌에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스스로 영문보습반을 운영하였다. 그간 수년 동안 공헌한 바가 심히 적으나 성심성의껏 노력을 다하였다...... 세계대전이 장차 종결되고 주축국의 붕괴가 임박한 이때 우리 한민족 운명의 신은 나에게 서둘러 전쟁터로 가서 승리의 영광을 쟁취하라고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숙연히 행장을 갖추고 제2의 고향을 떠나려 할 때 감정이 복받쳐 올라 이 기념책을 만들었다. 이로써 잊지 못할 충정을 표함과 동시에 그대의 서명을 간구하여 평생 잊지 않고자 한다.
서언에서 그는 자신의 혁명 활동을 돌아보고, 취안저우에서 7년 동안 생활하면서 호의를 베푼 지인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하면서, 제2의 고향을 떠나려니 감정이 복받쳐 올라 그들의 서명을 간구하여 평생 잊지 않으려는 생각에서 기념책을 만들었다고 하였다.
1권의 구성은 전후 순서가 시간 순으로 되어 있지는 않다. 시기적으로는 1935년 5월에서 1946년 10월까지의 기록이다. 우선 1935·36년은 지역 표기가 없다. 다음으로 1944년 8월 이후 1945년 2월까지는 취안저우 중심)에서 장저우漳州, 난안南安, 닝안, 젠양 등으로 이동하면서 작성된 것이다. 세 번째 시기는 1945년 9월부터 10월까지로서 장시성 하커우河口와 저장성 푸춘강富春江에서 작성되었다. 네 번째 시기는 1946년 6월부터 10월까지로 타이완의 타이중臺中과 지룽基隆에서의 기록이다.
기록 언어는 대부분 중문이나 그중 영문 2편, 한글 3편이 보인다. 중문의 경우 자신이 가르쳤던 학생들과 취안저우에서 함께 지냈던 지인들이 주를 이루고 있으며, 수년 간 지냈던 취안저우 진장현의 국민당부, 참의원 등의 주요 관공서에서도 글을 남기고 있다. 한인의 글과 서명의 경우 1945년 2월 젠양과 동년 9월 하커우, 광복 이후 타이완에서 작성된 것이다.
1권에 수록된 헌사의 내용을 살펴보자. 1권에는 대체로 혁명 지도자 오산에 대한 존경과 우의, 작별의 아쉬움, 미래에 대한 축복과 기원 외에 한국의 광복을 염원하고, 항일투쟁의 결의를 다지고, 일본의 패전과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고, 한중우호와 세계평화에 대한 기원을 표현하고 있다.

설니홍조
完成抗建大業 吾山老同志
秋潔贈〔印〕
卅三、九月五日
항전 건국의 대업을 완성합시다. 오산 동지
치우지에 드림〔印〕
1944년 9월 5일
我敬愛你 我會常時念着你 吾山吾師
生林馥泉〔印〕
一九四四、九、七. 福建南安埔頭心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항상 그리워할 겁니다. 우리 오산 선생님
학생 린푸취안〔印〕
1944년 9월 7일, 푸젠 난안 푸터우신
敬祝 韓國革命成功 吾山先生
莊澄波〔印〕
卅三年秋於晉江縣黨部
삼가 한국 혁명의 성공을 축원합니다. 오산 선생
좡청보〔인〕
1944년 가을 진강현당부에서
萍水相逢慶勝利 凱歌高唱還故鄉
在日寇無條件投降中國戰區簽字日後三天于富春江旅次
謹獻敬 李吳山先生留念
王以朗
卅四年九月十二日
우연히 만나 승리를 축하하고
승리의 노래를 소리 높여 부르며 고향으로 돌아가네.
왜구가 중국전구에서 무조건 투항을 서명한 지 3일째 되는 날
푸춘장 여행 중에
삼가 올립니다 이오산 선생 유념
왕이랑
1945년 9월 12일
2권은 권두에 서명을 청하는 선생의 글씨, 다음으로 1947·48년경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원곡 김기승, 백범 김구, 석정 안종원, 이광수, 송무빈, 이시영이 쓴 글과 서명이 차례로 보인다. 그 중 백범이 1947년 겨울에 쓴 글은 중국 송대 문인 범준範浚의 「심감心箴」을 옮긴 것이다.
茫茫堪輿俯仰無垠人挎其間渺然有身是身之微太倉稊米参爲三才曰惟心爾往古来今孰無此心心爲形役乃兽乃禽惟口耳目手足動靜
投间抵隙爲厥心病一心之微眾欲攻之其與存者於乎幾希君子存誠克念克敬天君泰然百體從令
丁亥冬中白凡金九弟書心箴以應 李吾山仁兄所請〔印〕
아득한 우주는 굽어보고 우러러보아도 끝이 없는데, 사람이 그 사이에 있으니 아득히 멀고 넓은 가운데 몸이 있다. 이 몸의 작음을 비유하면 큰 창고에 쌓여 있는 쌀알과 같은데, 삼재에 참여하게 된 것은 오직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누가 이 마음이 없었겠는가, 마음이 형체에 부림을 당하니 결국 금수와 같아졌다. 이는 입과 귀와 눈, 손과 발의 모든 움직임에 틈이 생겨 그 마음의 병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미약해지면 수많은 욕심이 공격하니, 그 마음을 온전히 보존하는 사람이 슬프게도 드물구나. 군자는 마음을 보전하기 위해 성심을 보존하고 생각을 이겨내고 능히 공경하니, 천군이 태연함은 온몸이 마음의 명을 따랐기 때문이다.
丁亥(1947) 겨울 백범 김구가 心箴을 써서 李吾山 仁兄의 청에 응하다〔印〕

백범 김구가 설니홍조에 남긴 글
‘설니홍조’는 이강의 삶의 궤적과 그 속에 담겨진 지인들과의 관계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중국 푸젠성福建省을 중심으로 동남부 지역과 타이완에서 활동한 오산의 각 시기 이동 경로와 접촉한 사람들과 기관 단체들을 엿볼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중국과 한국에서 만난 지인들을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그들이 남긴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특히 해방을 전후한 시기 지역에서 영어교사를 하면서도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던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항일의식을 공유하고, 한국의 독립을 염원하였던 그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