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임시의정원, 대한민국 의회제도의 출발을 알리다!
— 글. 이병규(동의과학대학교 교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이를 통치함”
(1919년 임시헌장 제2조)
임시의정원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인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제헌국회이자 입법기관의 역할을 담당하며 우리나라 근대 의회제도의 출발을 알렸다.
우리나라에서 근대입헌주의가 싹트기 시작한 것은 1894년부터 1896년 사이에 추진된 갑오개혁 전후, 근대법 제도에 관심이 커지면서부터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함포외교와 만국공법이라는 두 가지 무기로 우리나라 쇄국정책을 해체하고 본격적인 침략을 감행했다.
이런 격동기에 고종은 근대적 개혁안을 담은 「홍범 14조」를 발표하여, 대외적으로 청과 관계를 단절하는 자주독립을 선언했다. 또한 청일전쟁(1894)과 아관파천(1896)이 발발하고 결성된 독립협회는 인민을 대상으로 계몽운동과 정치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종로 광장에서 최초의 민중대회인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정부의 외세 의존적인 정치‧군사‧경제정책을 규탄하고,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정의 자주노선을 요구했다. 이후 광무개혁 시기에 「대한국국제」(1899)를 반포하여, 국호를 ‘조선’에서 ‘대한’으로, 국가 형태를 군주국가로 바꾸었다.
이 시기에는 책이나 신문 등에 서구 의회제도가 소개되기 시작했다. 유치형은 1907년 저술한 「헌법」에서 군주국 의회의 헌법상 지위를 군주의 통치권 행사를 위해 설치한 기관이라고 하고, 전영작은 『태극학보』 제10호(1907)에서 몽테스키외의 권력분립원리와 함께 입법권의 지위와 기능을 상세히 소개했다. 또 윤치호는 의회 설립을 위한 준비 작업의 일환으로 로버트의 저서 『Pocket Manual of Rules of Order for Deliberative Assemblies(“Robert’s Rules of Order”), 1876』을 『의회통용규칙』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출판하기도 했다.

3•1운동 직후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도하기 위한 임시정부 수립이 당면 과제가 되자 국내외 독립운동가 29명은 1919년 4월 10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3・1운동의 민주주의 이념과 민족자주 정신을 계승하여 임시의정원을 구성하였다. 임시의정원은 초대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손정도를 선출하고,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하는 국무원을 구성하였다. 국호는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하였다.
임시의정원은 1919년 4월 25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법 제2조에 따라 인구 30만 명당 의원 1인을 정하여 경기도・충청도・경상도・전라도・함경도・평안도에 각 6인, 강원도・황해도・중령교민・아령교민・미령교민에 각 3인을 무기명 단기투표, 즉 비밀선거에 의해 선출하도록 함으로써 인구 비례에 따르면서도 지역대표성을 가지도록 하였다. 실제로는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가 각 선거구의 원적지에 따라서 선거권을 대행하였고, 의원 정원수도 미달하는 경우가 많아 10여 명 안팎일 때도 있었다. 임시의정원법 제3조는 “의원 임기는 2개년으로 하되 매년 3분의 1을 개선함을 득함”이라고 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의 임기를 2년으로 하고 특별히 연임을 제한하는 규정을 두지 않았다.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는 임시정부 하에서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선거제도가 마련되어 시행되었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2조에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야 이를 통치함”이라고 규정한 것은 임시의정원이 입법 기능과 국정 전반에 대한 심의・의결 및 각종 동의권을 가질 뿐 아니라 정부에 대한 비판・감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임시헌장 제10조에 “임시정부는 국토 회복 후 만 1개년 내에 국회를 소집함”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임시의정원이 광복 후 새롭게 개원할 국회의 전신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국회도서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법(1974, 필사본)
임시의정원에 의장 1인과 부의장 1인을 두었다. 임시의정원 의장과 부의장은 각각 기명단기식 투표로 의원이 호선하며, 투표 총수의 과반수를 득표한 자가 당선되도록 하였다. 비서국을 두어 법률안 심의・의결, 예・결산안 심의 확정과 기타 의정 활동에 필요한 사무를 처리하도록 하였다. 비서국은 오늘날 국회사무처와 같은 기능을 하는 입법 지원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개정 임시의정원법은 제4장 위원회에 제18조에서 제43조에 걸쳐 위원회제도와 운영에 대한 상세한 규정을 두었다. 임시의정원은 위원회로 전원위원회, 상임위원회와 특별위원회를 두었다. 이처럼 임시의정원은 오늘날과 같은 위원회 중심주의를 실천하고 있었다.
임시헌법 제25조에 따라 임시의정원의 회의는 공개를 원칙으로 하되, 임시의정원의 결의나 정부의 요구가 있을 때는 비밀로 할 수 있었다. 또한 임시의정원의 의사는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다수결에 의하도록 하였으며, 법률안을 신중히 검토하기 위하여 단계적으로 심의하는 독회제도를 두었다. 즉 개정 임시의정원법 제46조는 법률, 재정과 기타 중대 사건에 관한 의안은 3독회를 거치지 않으면 의결할 수 없도록 하였다. 이러한 임시의정원의 독회제도는 3독회제도를 두었던 1948년 국회법 규정과 유사한 면이 있으나, 현행 국회법은 독회제도를 두고 있지 않다.
임시헌법과 임시의정원법 등은 국회 의사원칙으로 일사부재의의 원칙과 회기계속의 원칙 등에 대해서는 따로 규정하지 않았다.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사진(1919. 9. 17.)
임시의정원은 다음과 같은 지위와 권한을 가진다.
첫째,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 입법기관의 지위를 가진다. 의회의 가장 본질적이고 역사적인 권한은 입법에 관한 권한이다. 이에 임시헌법은 제5조에서 “대한민국의 입법권은 의정원”이라고 규정하였다.
둘째, 임시의정원은 정책통제기관의 지위를 가진다. 의회는 입법기관의 지위와 함께 국정의 감시·비판·견제기관의 역할도 수행한다. 이에 따라 임시의정원은 임시정부에 대한 견제기관으로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예컨대, 임시의정원의 임시대통령 탄핵심판권(제21조 제14호), 법률 기타 사건에 관한 의견의 임시정부 건의권(제21조 제11호), 국무원 및 주외 대사 공사 임명 동의권(제21조 제6호), 임시대통령 선거권(제21조 제5호), 국무원 출석답변요구권 등을 가짐으로써 정부를 견제할 수 있었다.
셋째, 임시의정원은 주권행사기관의 지위를 가진다. 임시헌법은 제2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대한인민에게 재함”이라고 하고, 제6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행사는 헌법규범 내에서 임시대통령에게 위임함”이라고 규정하여, 국민주권주의를 취하면서도 그 행사는 임시대통령에게 맡기고 있다. 대의제도에 따라 임시의정원이 주권행사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일정 부분 담당하고 있다. 특히 국민주권의 전임자인 대통령을 임시의정원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있고(제12조), 또한 임시헌법 제5조에서 입법, 행정 및 사법으로 권력을 분립하고 있다. 이에 임시의정원은 인구 비례에 따른 각 도의 대표이자 전국 국민의 대표로 구성된 대의기관으로서 가장 중심된 주권행사기관의 지위를 가진다.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촬영(1921. 1. 1.)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에 의해 탄생했고, 임시의정원에 의해 통치되었으며, 임시의정원에 의해 지탱되었다. 따라서 임시정부는 임시의정원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로서의 위상과 성격을 지닐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상황에서도 제헌의회로서 헌법을 제정하고, 입법부로서 역할을 했다. 또한 의회제도와 의회 관련 법률, 운영 절차는 오늘날 우리 국회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특히 임시정부 시절 척박한 환경에서도 민주주의의 꽃인 대의제도를 실천했다는데 오늘날 큰 교훈을 준다.
광복 80년, 임시정부 수립 106주년을 맞은 올해, 일제강점기 국권 회복과 식민지 조선인의 권리를 대변하고자 임시국회로서 역할을 다한 임시의정원은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의회제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정치·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우리 국회와 정치는 106년 전 임시의정원의 탄생과 운영에서 그 답을 찾을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