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메뉴버튼 퀵메뉴버튼 최상단으로 가기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으로 본 독립운동 통합운동

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으로 본 독립운동 통합운동

— 글. 조철행(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원 연구위원)

1919년 4월 10일 하오 10시부터 4월 11일 상오 10시까지 밤을 새우며 12시간 동안 중국 상하이上海 프랑스조계法界 찐션푸로金神父路에서 29명의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가운데 회의가 개최되었다. 개회 후 바로 본회 명칭을 임시의정원이라고 정하고 의장·부의장·서기 등을 선출했다. 날이 바뀐 11일에는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국호를 대한민국, 관제를 총리제로 결정하고 국무총리와 각부 총장 등을 선출했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헌법인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제정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헌법을 제정한 이 회의가 바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①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총리제, 전문 10조)을 제정·공포한 이후 5차례의 개헌을 단행했다. ② 1919년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법(대통령제, 전문 8장 58조), ③ 1925년 4월 7일 대한민국 임시헌법(국무령제, 6장 35조), ④ 1927년 4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약헌(국무위원제, 5장 50조), ⑤ 1940년 10월 9일 대한민국 임시약헌(주석제, 5장 42조), ⑥ 1944년 4월 22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주석·부주석제, 전문 7장 62조) 등이 그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국민은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을 선언한 결과로 임시정부를 건설”했고 그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주권이 행사되는 최고기관이며 동시에 독립운동의 중앙본부(국무원포고 제1호, 1920년 1월)”라는 이중적 위상을 가진다고 선언했다. 전체 독립운동전선의 최고기관이라는 ‘독립운동의 중앙본부’라는 ‘위상’과 독립운동 통합운동이 각각의 ‘임시헌법’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를 상하이 시기와 충칭重慶 시기로 나누어 살펴보려 한다.


상하이 시기

① ‘헌장’은 민주공화제, 평등권, 자유권, 참정권 등 10개 조를 명시한 선언적 규정이다. 독립운동 통합운동과 관련해 임시의정원 기사록을 보면 “본국本國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는 부인하자”는 제의는 부결되고, “임시정부의 소재만 표명하고 관제와 국무원國務員은 따로 의결”하기로 가결되었다. 여기서 ‘본국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는 ‘경성京城독립본부’ 명의의 집정관제 임시정부안으로 1919년 4월 8일 상하이에 알려진 것이다.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에서 이 ‘임시정부는 부인하자’는 제의는 부결되고 존중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러나 내용 면에서는 독자적 임시정부를 조직한 것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 당시 국내에서 조직된 임시정부를 부인하지 않고 참작했지만, 관제·국무원 선출 등은 계승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유일무이한 ‘정부’임과 동시에 전체 독립운동전선의 최고 지도기관임을 자임했다고 할 수 있다.
② ‘헌법’은 1919년 2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와 합의한 정부통합안이 반영된 개헌이었다. 그 합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국민의회가 “상해와 노령의 정부를 모두 해소하고 한성정부를 계승한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임시정부는 임시헌법개정안과 정부개조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9월 6일 임시의정원은 임시헌법개정안을 수정·가결했다. 대한국민의회도 해산을 선포했다.
그러나 ‘헌법’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해산하지 않고 한성정부의 관제인 집정관제를 대통령제로 개정했으며 임시의정원 의원도 노령에 6명만 할당했다. 그 결과 이른바 승인·개조분쟁이 일어나 대한국민의회 주도자들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했다. 완전한 ‘통합정부’ 수립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것은 반임시정부 세력이 결집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③ 대통령 이승만의 미주 거주와 상하이 체류시(1920. 12. ~ 1921. 5.) 독립운동세력 통합 실패와 이념·독립노선 등의 차이, 국무총리 이동휘·노동국총판 안창호 등의 임시정부 탈퇴 등으로 임시정부는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연이어 국내외 독립운동 총지도기관 조직을 위한 국민대표회의 개최 요구와 그 결과 개최된 회의는 임시정부의 헌법·제도·인물을 실제운동에 적합하도록 개조하자는 개조파와 전체 독립운동세력이 신조직을 건설하자는 창조파 등으로 분열되어 통합에 이루지는 못했다. ‘헌법’은 이러한 독립운동전선 내부의 상황과 국민대표회의 폐회 이후 개조파가 마련한 임시헌법개정기초안이 반영되어 개헌되었다.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로 개헌된 ‘헌법’은 대한민국·임시정부·임시의정원·광복운동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임시의정원이 뽑은 국무령을 중심으로 국무원(5~10명)이 국무회의를 통해 일체 국무를 결정하는 집단지도체제로 운영되었다. 이 ‘헌법’은 당시 실지 실정에 맞는 대한혁명정부의 ‘혁명헌법’으로 평가받았다. 특히 “대한민국은 광복운동 중에는 광복운동자가 전인민을 대(표)함”이라 하여 이전 헌법에서 대한인민 전체를 적용했던 것에서 광복운동자로 한정하고 있다. 이것은 유일무이한 임시정부를 자임한 이전 헌법에서 벗어나 좀 더 실제적 독립운동 본부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할 수 있다.
④ ‘약헌’은 1920년대 중반기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계속되는 재정난과 인물난으로 존속하기도 어려운 상태와 중국지역 독립운동전선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민족유일당운동의 영향이 반영된 개헌이었다. 국무령 홍진이 1926년 9월 “전민족 대당체를 건립하자”는 시정방침을 발표하고 같은 해 12월 한국유일독립당상해촉성회의 발기를 위해 국무령을 사임했다. 그 뒤를 이어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하면서 내각 구성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바로 헌법개정에 착수했다. 이 개정헌법이 ‘약헌’이었다. ‘약헌’은 정부 수반을 없애고 회의체 지도체제인 국무위원회제를 채택했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최고권력이 임시의정원에 있다”라고 하여 임시의정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부상했다. 이는 국무위원제 내각 구성을 원활하게 해 임시정부를 유지하기 위한 자구책의 성격을 가졌다.
“광복운동자의 대단결인 당이 완성된 때에는 국가의 최고권력이 이 당에 있음”이라는 조항을 넣어 당시 상하이, 베이징北京 등에서 일어난 유일당운동이 통합된 하나의 당으로 조직될 때는 최고권력으로 인정한다고 명시했다. 나아가 ‘약헌’ 개정도 통합된 당에서 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중국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일어난 독립운동 통합운동인 유일당운동을 수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유일당운동들이 하나의 당으로 통합된다면 임시의정원이 가진 권한과 임무를 이 당으로 이관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대한민국 임시약헌(1940. 10. 9.)

충칭 시기

⑤ 1940년 9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32년 윤봉길의거 이후 일제의 추적을 피해 항저우杭州를 시작으로 치장綦江까지의 이동시기를 거쳐 충칭에 안착했다. 이 시기 1935년 7월 좌우익 독립운동정당들이 통합되어 조선민족혁명당이 결성되었으나 이념과 당 주도권 등의 문제로 우익 정당들이 탈퇴했다. 1937년 8월에 우익정당들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12월에 좌익정당들이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해 독립운동전선은 양분되었다. 이즈음 일제의 본격적 대륙침략인 중일전쟁의 발발과 중국국민당 정부의 좌우합작 권고 등으로 1939년 5월 김구와 김원봉은 「동지·동포에게 보내는 공개통신」에서 전민족의 역량을 집중하고 혁명적 강령에 기초한 통일조직의 건설을 천명했다. 그 결과 두 진영은 같은 해 9월 전국연합진선협회를 결성했으나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와 당원 자격 문제 등으로 탈퇴해 무산되었다. 한편 세계 2차대전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미일전쟁을 전망하면서 항일역량의 총결집을 모색해 나갔다. 그 결과 우선 우익 3당이 통합해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을 모색하기 위해 한국광복군을 창설해 전시체제로 들어갔다. ‘약헌’은 이러한 정세의 변동 속에서 반일 역량의 총결집과 강력한 지도체제의 수립 필요가 반영되어 개헌되었다.
‘약헌’의 가장 주요한 특징은 효율적 대일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단일지도 체제인 주석제로의 개정이었다. 주석은 “국무위원회의의 주석이 됨, 임시정부를 대표함, 국군을 통감統監함, 긴급명령을 발함” 등의 직권을 가졌다. 이 시기에 이르러 우익 정당들이 통합해 정·당·군(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독립당, 한국광복군) 체제를 갖추었다.
⑥ 좌익진영에서 반일 역량을 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집결하여 전민족적 총단결을 이루자는 선언이 발표되고 1941년 4월 하와이에서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합하기 위해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결성하였다. 이어 같은 해 12월에 일제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났다. 태평양전쟁 발발 3일 뒤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전망하면서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그 결과 제일 먼저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편입되어 군사적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어 10월에는 좌익진영 인사 14명이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됨으로써 ‘통일의회’가 구성되었다. 이로써 좌우익진영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과 임시의정원으로 통합을 이루었다. ‘헌장’은 이러한 좌우익진영의 군사와 의회의 통합 상황과 아울러 임시의정원 회의(제34차)에서 제기된 국무위원 인수 및 배정, 임시의정원 의원 선거방법과 임기 규정 마련, ‘약헌’ 개정 문제 등이 반영된 개헌이었다.
‘헌장’은 ‘약헌’ 보다 주석의 위상 강화, 좌익진영의 참여를 배려한 부주석제의 신설 및 국무위원을 8~14인으로 증원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는 좌익진영이 임시정부에 참여함으로써 각 정파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었다.
‘헌장’이 공포된 이틀 뒤 좌익진영인사 김규식(부주석), 김원봉(군무부장) 등 6명이 국무위원으로 취임하였다. 이로써 중국 관내 지역 좌우익세력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어 좌우연합정부의 위상을 가지게 되었다.


©조인래

대한민국 임시헌장(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