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온 소식
임시정부의 통합을 지향한 ‘대한민국 임시헌법’
— 글. 윤대원(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독립기념관
3・1운동 이후 나라 안팎에서는 여러 임시정부가 수립되거나 선언되었다. 이들 임시정부 가운데 실체를 갖춘 임시정부는 러시아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1919. 3. 17.)와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 4. 11.)였고, 나머지는 선언 주체가 불분명하거나 나라 안에서 선언한 임시정부의 경우 일제가 강점하는 상황에서 사실상 정부를 운영할 수 없는 이른바 ‘삐라(전단)정부’였다. 다만 서울에서 선언한 ‘한성정부’(1919. 4. 17.)는 외신을 타고 세계에 알려지기도 했다.
이렇듯 나라 안팎에서 여러 임시정부의 수립과 선언이 거의 동시에 이루어진 것은 각지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소통이 원활하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의 자주민임을 선언”한 3・1독립선언서의 정신을 실천한 결과였다. 그러나 하나의 민족에 여러 정부가 있을 수 없듯이 당연히 이들 정부는 하나로 통일해야 했다. 1919년 5월 이후 상하이의 임시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는 ‘정부 통합’ 논의를 이어갔고, 우여곡절 끝에 그해 8월 ‘서울에서 조직한 한성정부를 계승’하는 방식으로 정부를 통합하기로 합의했다.
정부 통합 논의가 이루어지는 사이 상하이 임시정부에서는 국무총리대리 안창호의 지휘 아래 내무차장 신익희가 중심이 되어 통합정부의 수립에 대비하여 ‘임시헌법개정안’과 ‘정부개조안’을 마련하고 임시의정원에 의회 소집을 요구했다.
여기서 검토할 「헌법안삼독」(『독립신문』 제7호, 1919. 9. 9.)은 8월 28일 임시헌법개정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한 뒤 9월 4일부터 개정안이 만장일치로 통과한 6일까지 진행한 제3독회의 내용이다. 「개정공포된 신헌법」(『독립신문』 제9호, 1919. 9. 16.)은 9월 11일 공포한 ‘대한민국 임시헌법’이다. 헌법개정 논의 과정은 같은 시기 『독립신문』의 임시의정원 관련 기사와 임시의정원에서 정리한 「임시의정원 기사록 제6회(1919. 8.)」를 참고할 수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안창호가 소집을 요구한 임시의정원 제6회 회의는 1919년 8월 18일 열렸다. 임시헌법개정 작업은 8월 28일 임시정부에서 임시의정원에 10개조의 ‘임시헌장’을 대폭 확대한 8장 57조로 구성한 ‘임시헌법개정안’과 ‘정부개정안’을 제출하면서 본격화했다. 임시의정원은 두 안건을 28일 당일 법제위원회에 넘겨 수정 작업을 하게 했다. 이틀 뒤인 30일 법제위원회가 원안의 수정 결과를 보고하자 임시의정원에서는 정부에서 제출한 원안과 법제위원회 수정안을 대조하며 세 차례 독회를 열고 토의 심의하기로 했다.
9월 3일까지 진행한 제1, 2회 독회에서 원안의 ‘외교대사’를 ‘주외대사’로 고쳤듯이 자구 수정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데 다음날 제2독회를 끝내고 제3독회를 시작하기 직전 몇몇 조항에 대해 정부 측과 논쟁이 있었다. 의원들은 이전 임시헌장의 제3조(「대한민국의 인민은 남녀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임」), 제7조(「대한민국은 신의 의사에 의하여 건국한 정신을 세계에 발휘하며 나아가 인류의 문화 및 평화에 공헌하기 위하여 국제연맹에 가입함」), 제8조(「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 그리고 제9조(「생명형・신체형 및 공창제를 폐지함」) 등의 조항을 왜 삭제했냐고 따져 물었다.
이에 헌법개정을 주도한 신익희는 평등 문제에 대해 지금 사회는 남녀, 빈부, 귀천보다도 현명함과 어리석음 등 여러 종류의 차별이 있고, 국제연맹 가입 문제는 자유의사이며 생명형과 공창제 등의 조항도 문명한 나라에서 헌법에 이를 명시하는 것이 수치이기 때문에 삭제했다고 답변했다. 후일 10개조의 임시헌장을 작성했던 조소앙은 개정헌법에서 제3조와 제9조를 삭제한 데 대해 ‘빈부, 귀천, 남녀의 평등은 현시대의 진행 곡조다. 곡조를 모르니 어찌 시대와 함께할 수 있으리’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제국주의 시대 일제 강점하의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광범한 불평등과 모순의 현실을 도외시한 이상주의적 접근에 대한 비판인 것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9월 4일 임시의정원에서는 임시헌법개정안에 대한 심의가 막바지에 이르렀다. 의원들은 두 차례에 걸친 독회를 마친 뒤 이제 마지막으로 8장의 헌법개정안을 한 장章씩 전체적으로 토론 심의하기 시작했다.
4일 제1장 ‘강령’의 토의에서는 제2독회에서 부결되었던 구황실우대조항을 조완구 등의 주장으로 제1장 제6조에 이어 「제7조 대한민국은 구황실을 우대함」이란 한 조항을 다시 추가하기로 의결했다. 사실 ‘황실우대조항’은 임시헌장의 제정 때에도 논쟁이 되었는데 이는 봉건적 잔재였다. 이어진 다음날 제2장 ‘인민의 권리와 의무’의 토의에서는 제8조 제3항에 있던 「신교信敎의 자유」를 제1항으로 옮기기로 의결했다. 장붕, 김병조 등 기독교인들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다.
제3장 ‘임시대통령’의 토의에서는 제15조 대통령의 권한 가운데 제12항의 「훈장 기타 영전을 수여함」을 전부 삭제하기로 했다. 삭제를 제기한 여운형은 ‘관리가 인민을 표창하는 것은 낡은 사상’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대통령의 권한 가운데 제5항 즉 「임시의정원의 동의를 거쳐 개전 강화를 선고하고 조약을 체결함」 중에서 ‘동의’를 ‘결의’로 고치기로 했다. 하지만 이 조항은 헌법개정안이 통과된 뒤 정부 측에서 다시 재의를 요구하여 원래대로 ‘동의’로 다시 수정했다.
제4장 ‘임시의정원’에서는 「제21조 본원 의원이 관리로 임명되는 시는 의원의 자격이 상실함」을 제20조에 이어 추가하기로 했다. 국무원이나 정부 관리가 의원이 됐을 때 이해충돌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 조항 역시 정부 측에서 삭제를 재의 요구하여 삭제되었다. 또한 제19조의 의원 자격 가운데 25세 이상을 23세 이상으로 낮추기로 했다. 이번 독립운동에서 23~25세의 청년이 25세 이상의 국민보다 공적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신교육을 받은 자가 많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어 제5장을 검토하면서 회의장에는 큰 긴장감이 흘렀다. 통합정부가 들어서면 정부 개조에 의해 국무총리대리인 안창호가 ‘한성정부’의 조직대로 노동국총판이 되기 때문에 국무원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노동국을 다른 부서와 같이 ‘노동부’로 고쳐 ‘노동부총장’으로 하자는 수정안이 제출됐다. 그러자 안창호는 자신이 정부를 개조하자는 목적은 ‘첫째 정부를 개조하여 한성 발표의 정부와 동일히 할 것, 둘째 집정관총재를 고쳐 대통령으로 할 것’이라며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고치는 것 외에는 한성정부를 일점일획도 고칠 수 없다’며 극구 반대했다. 결국 이 문제는 안창호 자신의 반대로 무산됐다. 의회는 제5장까지 제3독회를 마치고 정회했다.
이어 6일, 나머지 제6장 법원, 제7장 재정, 제8장 보칙은 별다른 이의 없이 심의를 마쳤다. 의회는 그날 오후 3시 임시헌법개정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고 다음날 이 사실을 국무총리대리에게 통고하였다. 그러자 국무총리대리 안창호는 다음날인 8일, 개정안 가운데 3개항에 대해 다시 심의를 요구하는 재의요구서를 임시의정원에 제출했다. 의회는 3개항 가운데 1개항(제21조)만 삭제하고 나머지 두 조항은 정부안대로 의결했다. 이로써 정부 측에서 제출한 임시헌법개정안은 심의를 완전히 종결했고, 9월 11일 ‘대한민국 임시헌법’으로 공포되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을 때 10개조의 임시헌장은 선언적 의미가 강하여 정부를 운영 유지하기에 부족한 헌법이었다. 이 한계는 정부통합 운동을 계기로 헌법 체제를 갖춘 전문과 8장 58조로 구성한 임시헌법을 제정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임시헌법은 안창호가 헌법개정안을 제출하면서 “4월 11일에 발포한 10개조의 임시헌장을 기본삼”았다고 했듯이 그 정신은 임시헌장의 연장선에 있었다.
그러나 임시헌법은 임시헌장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것은 삼권분립(제5조 「대한민국의 입법권은 의정원이 행정권은 국무원이 사법권은 법원이 행사함」)과 함께 임시의정원과 임시대통령의 관계에서 대통령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점이다. 임시헌장에서는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하여 통치함」(제2조)이라 하여 대의제로 규정했다. 그런데 임시헌법에서는 임시대통령은 국가를 대표(제11조)할 뿐만 아니라 강령 제6조에서 “대한민국의 주권 행사는 헌법 범위 내에서 임시대통령에게 전부 위임”한다고 규정하여 임시대통령에게 삼권을 초월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했다. 이밖에도 임시대통령은 임시의정원을 소집할 수 있고(제15조 제7항), 계엄 선포권(제15조 제7항)과 긴급명령 발포권(제15조 제10항) 등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다. 여기에다가 임시대통령의 임기 규정도 없어 임시의정원의 탄핵 없이는 영원히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상과 현실의 융화’를 강조했던 헌법개정의 결과는 임시헌법 제6장 법원 설립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현실성이 없는 것이었다. 남의 나라에서 재판권을 행사한다는 것은 국제법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대통령제 임시헌법이 제정되고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새롭게 들어설 통합정부에 대한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그 기대는 얼마 가지 못하고 임시정부는 분열과 내부 갈등에 휩싸였고, 급기야 임시정부 안팎에서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건설하자는 국민대표회 운동에 부딪히는 위기를 맞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이승만의 권력욕이 통합정부 수립의 본 의미를 뒤틀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4월 11일 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에 선출됐다는 연락을 받았고 이후 미주에서 국무총리 행세를 했다. 그런데 이승만이 파리강화회의에 ‘위임통치론’을 주장했다는 문제로 마찰이 일어나면서 임시정부와 불편한 관계가 됐다. 그러던 중 자신이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로 선출된 사실을 알고부터 미주에서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 내지 대통령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안창호가 ‘임시헌법의 개정이나 정부개조가 다만 집정관총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개정하기 위함’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통합정부를 수립하더라도 결국 통합정부와 이승만이 대통령인 ‘한성정부’가 여전히 존재하여 사실상 통합정부의 수립이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개정임시헌법 즉 대한민국 임시헌법의 제정에 대한 이러한 역사적 의미와 더불어 임시헌법 자체에 대해서는 ‘전문을 포함한 정밀한 헌법으로서 임시정부 헌법으로서는 거의 완벽한 내용을 갖춘 헌법’, ‘헌법으로서 체제를 갖춘 헌법’이라거나 ‘1910년대 중국의 제헌 운동에서 제정된 여러 헌법 문서를 적절히 발췌하여 편집한 번안 헌법’이라는 등의 평가가 있다. 중요한 것은 헌법만으로 독립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의 헌법은 정상적인 국가의 헌법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