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독립운동
탈식민주의의 상징
‘알제리 독립운동’
— 글. 임기대(부산외국어대학교 프랑스어과교수, 아프리카연구소장)
©임기대
알제리 중심가의 압델카데르 동상
1962년은 8년간의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끈 알제리의 독립의 해이다. 8년간의 전쟁이지만 알제리는 132년 간의 식민 지배를 받으면서 투쟁과 저항의 정신을 키우며 프랑스에 맞서 싸워왔다. 신생 국가 알제리가 당시만 해도 세계 최강국 중 하나인 프랑스를 물리쳤다니 그들의 국가적 정체성은 대체 어떤 상황이었을까? 아니 국가란 조직이 있기나 한 것일까?
1830년 프랑스군이 처음 알제리에 상륙할 당시의 알제리는 명목상 오스만 제국의 한 지역이었지만, 실제로는 중앙 통제가 거의 미치지 않는 독자적 정치 체제에 가까웠다. 강한 중앙 권력이 없다 보니 지역 세력들은 분산된 상태였다. 당연히 국가 체제나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할 수가 없었다. 해안 지역은 오랫동안 바르바리 해적 활동과 유럽 상선에 대한 약탈, 노예무역으로 경제적 기반을 유지해 왔다. 그러나 18~19세기에 유럽 국가들과 평화조약이 증가하면서 해적 활동이 차단되고, 이 수익이 급격히 줄었다. 경제가 활력을 잃어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은 힘을 잃어갔고 19세기 초 유럽은 나폴레옹 전쟁을 거치며 해상·군사력을 강화했으며, 알제리는 이에 대응할 방법이 부족했다. 프랑스의 정치·경제 상황이 악화되며 통치자인 샤를 10세(1757~1836)는 국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한 전쟁을 물색했다. 알제리가 프랑스와 작은 외교 마찰을 일으켰고, 샤를 10세는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알제리 침공을 시작했다.
비록 국가 형성은 갖추지 못했지만 알제리는 그리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이때 오늘날까지 알제리 민족주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 출현한다. 에미르 압델카데르Émir Abdelkader(1808~1883)는 현재까지도 알제리의 ‘정신적 지주’로 칭송받는 인물이다. 그는 이슬람적 규율과 교육을 기반으로 한 지도력, 프랑스군을 상대로 한 조직적 항쟁, 게릴라전·부족 통합·행정 정비 등 실질적 국가 만들기 노력을 통해 알제리인에게 ‘하나의 공동체’라는 자의식을 각인시켰다. 프랑스에 맞선 그의 항쟁은 비록 패배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매우 컸다.
프랑스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토지 몰수, 분리 정책, 프랑스인 정착민 우대 정책을 강화했다. 그 결과 토착민 농민의 몰락, 도시 빈민층 성장, 유목 경제의 붕괴, 교육·정치 참여의 철저한 배제가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은 알제리인에게 집단적 분노와 피해의식을 낳았고, 이는 민족주의로 발전할 감정적·사회적 기반이 되었다. 여기에 더해 압델카데르의 이슬람 중심의 공동체 정체성의 결속력은 제1차 세계대전과 더불어 정치적 민족주의가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알제리인은 프랑스군으로 전쟁에 동원되었고, 유럽을 직접 경험하며 정치 권리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얻었다. 이 시기 징집된 알제리인 간에 형성된 분위기는 “우리는 프랑스를 위해 싸웠지만 왜 여전히 시민이 아닌가?”였다. 그들은 프랑스인이었지만 “무슬림 프랑스인”으로 차별 대상이 되었다. 권리 요구는 민족적 자각으로 이어지고 정치 조직화의 기틀이 되었다.
정치적 민족주의의 결정적 계기는 1926년 ‘북아프리카의 별 (ENA)’을 결성하면서부터이다. 파리에서 결성된 ENA는 알제리 이주 노동자와 지식인이 함께 조직하며 알제리 독립을 명시적 목표로 설정했다. 나아가 북아프리카 전체의 해방을 지향했으며, 무엇보다 독립 항쟁가 압델카데르의 사상을 계승한다는 것을 목표로 했다. ENA는 압델카데르의 손자 하즈 압델카데르가 주도했으며 이슬람 공동체를 통한 대 프랑스 항전, 알제리 민족으로서의 정체성, 외세에 맞서는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주민들에 의해 파리에서 ENA 등을 통한 민족주의가 태동했다면, 무력 항쟁으로의 확산은 알제리 본국에서 발생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그 유명한 ‘세티프 학살’이다.
1945년 5월 8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던 바로 그날, 알제리 동부 지역의 세티프Sétif와 겔마Guelma 등지에서 수천 명의 알제리인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에 저항해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이 사건은 평화적 개혁이나 통합의 불가능성을 절감하는 충격적인 경험으로, 알제리 민족주의 운동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알제리인이 거리에 나선 것은 정치적 자유와 독립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2차 세계대전 참여를 대가로 약속한 독립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랑스 경찰이 시위대를 무력 진압하면서 폭력이 급격히 확산됐다. 세티프 시위 중 일부 무장 충돌로 프랑스 정착민 일부가 사망하자, 프랑스 식민 당국과 유럽계 민병대가 본격적인 보복에 나서면서 수천에서 수만 명의 알제리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사망자 수는 최소 3,000명에서 최대 45,000명까지 추정되지만 프랑스와 알제리에서의 통계는 각기 달랐다. 무차별적 폭격이 자행되었고 농촌 지역에서 집단 처형이 자행되었다. 주요 민족주의자와 노동운동가들이 선별 학살되는 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임기대
알제리 독립기념관 내의 프랑스 만행 사진
이 사건은 프랑스 문화에 동화된 알제리인마저도 프랑스와의 평화적 공존이 더 이상 불가능함을 절감하게 했다. 많은 알제리 젊은이들이 평화적 개혁 전략에서 무장 투쟁으로 급진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프랑스어·문화와 공존하는 방식을 선호한 사람들마저 강경 투쟁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프랑스 본토의 이주 노동자와 학생들 사이에서 비밀 민족주의 단체 결성이 더욱 활발해졌고, 메살리 하지 주도 하에 알제리민족운동MNA과 민족해방전선FLN 등 독립운동 조직들이 프랑스 내 이민자 공동체를 결집하는 데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었다. 이 공동체들은 이후 독립 전쟁 과정에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과 직접 투쟁의 주요 기반이 되었었다. 학살의 집단 기억은 알제리 민족주의를 단순한 정치적 이념이 아닌 집단적 고통과 불의의 경험에 뿌리를 둔 ‘살아있는 현실’로 정착시켰다. 이 사건은 단순 사건이 아니라 이후 알제리 전쟁(1954~1962)까지 이어지는 민족해방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알제리 독립운동을 논할 때 여러 독립운동가들과 중요 단체가 있다. 먼저, 독립운동가로는 상술한 메살리 하지를 비롯해, 아메드 벤 벨라Ahmed Ben Bella(1916~2012), 모하메드 부디아프Mohamed Boudiaf(1919~1992), 후아리 부메디엔Houari Boumédiène(1932~1978) 그리고 상대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들까지 알제리에서 독립운동은 여전히 새로운 화두이며 계속 조명해가는 부분이다. 이들과 더불어 독립 이후에도 알제리 민족주의의 견고한 틀이 되는 단체는 바로 ‘민족해방전선’이다. 일명 FLN이라 불리는 이 단체는 프랑스 식민 지배에 맞서 독립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반식민 무장 조직이다. 1954년 11월 1일 FLN은 프랑스로부터 알제리의 독립을 위해 무장 투쟁 선언을 선포했다. 내부에서 일부 온건 투쟁을 제기한 세력이 있었지만 이를 과감히 버리면서 FLN은 프랑스 식민 당국에 대항하기 위해 도시와 농촌에서 게릴라전과 테러 전술, 외교전 및 심리전을 병행하는 종합 전략을 전개했다. 이들은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군사적 거점을 확보하는 한편, 도시에서는 조직적인 테러 공격을 감행해 식민 정부의 통치 기반을 약화시켰다. FLN의 전략은 민중 동원과 무장화에 기반한 것이었으며, 민중과 혁명 세력 간의 일체감을 조성하면서 강한 민족주의 정서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FLN과의 전쟁으로 프랑스는 약 50만 명의 병력을 투입했지만 고문, 강간, 학살 등과 같은 강경 진압으로 국제 사회의 비판을 받았다. 이런 프랑스의 만행은 오히려 국제 사회로부터 비난받는 역효과를 초래했으며 프랑스 내에서도 식민 지배에 대한 부정적 기류가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결국 1962년, 에비앙협정을 통해 알제리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FLN은 국가 건설이 되자 통치권을 이어받았고, 이후 일당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다.
©임기대
알제리 독립기념관 외관
독립 이후 알제리 민족주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명분으로 FLN은 범아랍주의Pans-Arabism, 사회주의 국가 건설, 강력한 이슬람국가 건설을 통한 탈식민화 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1960~1970년대 미-소 냉전 체제 하에서 비동맹주의와 제3 세계주의 흐름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FLN이 주장한 모든 이면에는 프랑스의 식민 잔재 청산과 새로운 체제 건설이 있었다. 1956년 FLN 내부 문서에는 다음과 같은 선언문 내용이 있다.
“우리FLN는 단언코 말하건데, 우리가 바꾸고자 하는 것은 현 체제를 발전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여태껏 있어 왔던 식민체제의 잔재를 완전히 일소하는 것이며 그것을 새로운 체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알제리 민중의 권리와 이해관계에 완전히 부합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강령을 뒷받침해주는 정치조직이 FLN이고, 군사 조직에는 오늘날 알제리군 민족인민군의 전신인 민족해방군ALN이 뒷받침을 해주었다. 이렇게 단일 정당을 유지한 FLN은 1965년 군사 쿠데타를 통해 후아리 부메디엔이 정권을 잡을 수 있도록 했고 이후 프랑스 체제 하에 있던 산업 시설을 국유화 조치했다. FLN은 혁명의 정통성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기능하는 모순이 있었기에 권위주의 형태의 정치 체제를 띄었다. 반면, 다당제 및 민주주의 체제와는 일정한 긴장 관계를 유지했다. 1978년 부메디엔 사후 알제리에서는 1980년부터 카빌리 지역을 중심으로 아랍·이슬람화 정책에 거부감을 갖게 된다. 이른바 ‘베르베르의 봄Berber’s Spring’1 이 불면서 다문화 욕구가 불고 당시 냉전 체제 붕괴와 더불어 다당제 도입, 자본주의로의 이행, 이슬람 세력의 등장 등으로 일당제의 균열이 보이기 시작하며 일당 체제 붕괴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제리 현대사에서는 FLN을 빼고 언급할 수 없을 정도로 FLN은 알제리인의 자긍심이 되었다. 하지만 민족주의와 탈식민주의화 과정을 거치면서 파워 엘리트와 권위주의가 형성되었고, 이후 권력을 독점하는 지배 엘리트로서의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 특히 젊은 알제리인의 외면을 받으며 한동안 그 입지가 흔들리기도 했다. 2020년 들어 압델마지드 테분Abdelmadjid Tebboune(1945~ ) 대통령이 집권하면서 군부와 더불어 알제리 정치 체제의 배후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오늘날 알제리인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독립기념관과 알제리 독립 기념일, 알제리 혁명 기념일이다. 이슬람 국가이기에 이슬람 축일이 즐거운 날이라면 이날은 축제적 성격과 경건함, 순국선열의 피로 일군 국가를 생각하는 경건한 날이다. 7월 5일의 알제리 독립 기념일은 프랑스가 알제리를 침공한 날(1830년 7월 5일)과 같은 날로, 의도적으로 같은 날짜에 독립을 선언해 역사적 상징성을 더하고자 했다. 일반적으로 7월 5일에는 알제리 전역에서 대규모 기념행사가 열리며, 행진, 불꽃놀이, 문화 행사 등이 열린다. 무엇보다 프랑스에 대한 기억과 사회적 논의를 활발히 함으로써 식민 지배의 잔혹성을 기리곤 한다.
우리나라와는 제국주의 시기 식민 지배 아래 주권을 상실했고, 민중을 기반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두 나라 모두 민족주의, 자결권,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했고, 국내외에서 무장 투쟁과 외교전을 병행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립 이후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룬 한국의 모델은 오늘날 많은 알제리인들에게 공감을 주고 있으며, 한국을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국가로 인식하게 했다.
1_알제리의 베르베르어권 카빌리 지역에서 발생한 시위이자 저항운동이다. 특히 저항과 평화, 희망을 노래한 카빌리의 가수 마투브 루네스(Matoub Lounés)의 사망은 많은 의혹과 함께 알제리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고, 그로 인한 문화적 변동이 일었다. 아랍⋅이슬람화 정책은 역설적이게도 베르베르 문화의 존재감을 부각시킨 것이다.
임기대·김광수, 2018, 「프랑스의 68혁명과 알제리의 탈중심주의 -베르베르(Berber)인의 소수자 권리-」, 『서양사론』 138, 155-19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