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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에서 온 소식

‘역사’ 〈한일관계사료〉로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독립’을 외치다

상하이에서 온 소식

‘역사’ 〈한일관계사료〉로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독립’을 외치다

『한일관계사료집』은 파리강화회의 실패 이후 임시정부가 국제질서의 흐름을 읽고, 사료와 논거로 무장한 새로운 외교 노선을 구축한 지적 · 정치적 산물이었다.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역사학과 부교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료편찬의 복사」,
『독립신문』 제1호(1919. 8. 2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료편찬회해산」,
『독립신문』 제8호(1919. 9. 13.)

역사로 무장한 신외교전략 구축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운동의 영향을 받아 그해 4월 11일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지에 설립되었다. 당시 한성정부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등도 있었지만, 외교·재정·인력·문서 체계에서 중심을 잡은 것은 상하이 임시정부였다. 1919년 9월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이들 3개 단체가 통합한 것도 그러한 이유가 컸다.
상하이 임시정부가 가장 먼저 펼쳤던 독립운동 방략은 ‘외교 독립론’이었다. 정부 수립 직후 가장 먼저 조직한 부처도 외무부였고, 가장 먼저 파견한 인물들도 외교사절이었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에는 제1차 세계대전에 뒤늦게 뛰어든 미국 대통령 윌슨이 1918년 1월 제시한 ‘민족자결주의’라는, 당시 국제질서를 뒤흔든 원칙이 자리하고 있었다. “모든 민족은 스스로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있다”라는 선언은 한국 독립운동의 전략을 국제 외교전으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였다. 이 선언은 전 세계 피식민지 국가들(한국을 포함해)의 독립운동 전략에 지각변동을 일으켰다.
이런 가운데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이 4년여 만에 막을 내리자, 프랑스가 앞장서 파리강화회의를 본격화했고, 그해 12월 중순부터 연합국 및 연합국 편으로 참전한 ‘관련국Associated Powers’ 총 27개국에 초청장을 발송했다. 영국·프랑스·미국·이탈리아 등 주요 4대국과 일본·벨기에·세르비아·그리스·루마니아·중국, 그리고 브라질 등 중남미 참전국을 비롯한 포르투갈·시암(태국)·체코슬로바키아 임시정부 등이었다.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막하자, 신한혁명당은 “한국 대표를 파리에 보내 한국 문제를 의제로 만들어야 한다.”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신한혁명당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1915년 3월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펼치던 박은식(1859~1925)·이상설(1871~1917)·여운형(1886~1947)·선우혁(1889~1967) 등이 전략적인 차원에서 설립한 단체였다. 이후 신한혁명당은 1917년 미국이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러시아혁명이 일어나자, 전쟁 후 국제질서가 개편될 것을 내다보고 한국의 정치적 대표성 차원에서 임시정부를 구상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한 일들을 실무 차원에서 추진하고자, 여운형·조동호(1892~1954)·장덕수(1894~1947)·김철(1886~1934) 등 청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1918년 8월 신한청년당이 만들어졌다. 그 전에 여운형은 1917년 말 중국 톈진天津으로 망명해 있던 김규식(1881~1950)을 상하이로 불러들였다. 그는 영어·불어 능통자로서 국제외교가 가능한 유일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기 전 만반의 준비에 열을 올렸다. 신한청년당의 전략은 ‘주권 잔존’을 내세워 회의의 ‘당사자’로서 활동하고, “한국의 독립 문제를 민족자결의 모델”로 만드는 데 있었다. 다만 공식 참가국이 아니기에 미국·프랑스 선교 네트워크를 활용하거나, 국제 언론에 ‘독립청원서’를 배포해 여론을 형성하거나, 중국 대표단을 이용해 한국 문제를 핵심의제로 올리고자 했다.
이를 위해 신한혁명당과 신한청년단 인사들은 「한일합병조약 불법성 분석 초안」, 「민족자결주의 적용 논리 초안」, 「한국 독립을 정당화하는 역사·정치 자료」 등을 작성했다. 김규식은 이러한 자료를 들고 1919년 2월 1일 상하이를 출발해 3월 13일경 파리에 도착했다. 김규식은 이동 중에 여러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했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당시 상황을 살핀 뒤 영어와 프랑스어로 「Petition of the Korean People to the Peace Conference(한국독립청원서)」를 완성했고, 「Memorandum on the Independence of Korea(한국 독립에 관한 각서)」를 별도로 작성했다. 핵심 내용은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일본의 불법 행위 폭로하며, 한국의 독립이 국제질서에 부합하는 해결책임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김규식은 1919년 4월경에 “Representative of the Sinhan Young Korean Party(신한청년당 대표)” 이름으로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파리강화회의 의장 겸 프랑스 총리에게 독립청원서를 가장 먼저 보냈다. 그해 4월 말 5월 초에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장을 받은 뒤에는 “Representative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표)”의 직함으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미국 대통령,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영국 총리 등과 각 대표단에 청원서를 공식 발송했다.
그러나 이들이 직접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수령 여부도 공식 문서에 “접수Received” 표기는 없고, 모두 중간 실무자Secretariat 선에서 접수 및 서류 분류가 이루어졌다. 사무국 직원은 비공식적으로 “한국대표단의 청원을 접수했으나, 조선 문제는 일본의 주권 주장에 속하는 사항으로 회의가 이를 심의할 수 없음을 유감스럽게 통보한다.”, “본회의 의제로 상정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초청국 대표만이 제출한 문제다.”라는 답변만 받았다. 더욱이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Versailles Treaty이 체결되면서 더 이상 한국 독립 청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한일관계사료집’ 편찬 작업의 시작

김규식은 이러한 사정을 즉시 임시정부에 보고했다. 핵심은 임시정부 파리한국대표부가 정식 대표로 승인되지 못했고, 한국 문제는 의제로 채택되지도 공식 토의도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일본 대표단의 방해가 매우 거셌고 강대국들이 한국 문제를 다룰 의지가 없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외교 실패의 가장 큰 요인으로 한국 병합의 불법성을 입증할 문서 부족을 꼽았고, 향후 국제연맹이나 다른 회로를 통해 다시 시도할 필요가 있음을 제안했다. 국제연맹 설립은 1919년 1월 강화회의에서 결정되었고, 그해 4월 관련 조약문이 완성되면서 구체화했다. 이는 베르사유조약 제1부로 포함되었고, 1920년 1월 정식발효되었다.
이 무렵 김규식은 미국으로 건너가 외교활동을 계속하고자 했지만, 여권과 비자 문제, 일제의 집요한 방해 공작에 미국 국무부가 그의 입국 허가를 사실상 거부하면서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김규식은 파리에 머물면서 파리한국대표부를 임시정부의 공식 대표단 체제로 재편하는 한편 국제연맹과 여론이라는 다른 문을 열어 한국을 다시 국제정치의 장으로 끌어올리려 했다. 이를 위해 김규식은 유일한 외교 창구였던 국제연맹의 규약을 분석했다. 그는 국제연맹의 규범·절차 안에 ‘한국 문제’를 편입시키고, 프랑스·영국 언론에 일제의 한국 침탈 관련 자료 제공, 미국 윌슨 측근 인사들과의접촉 등을 시도했다.
한편, 김규식의 보고를 접한 임시정부는 ‘파리 직접 외교’의 실패를 인정하면서 한국병합의 불법성, 일본의 폭압 통치 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이를 주도한 것은 국무총리 대리와 내무총장을 겸임하고 있던 안창호였다. 그는 1919년 7월 임시정부 산하에 사료조사편찬부를 설치하고 한일관계사료집 편찬을 시작했다.
그 뒤 1919년 7월 손정도 임시의정원 의장 주재하에 열린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7.7.~7.19.)에서 관련 논의가 본격화했다. 안창호는 시정방침 연설에서 국제연맹회에 제출할 안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의회가 전담하든지 임시정부에 위임해 달라고 요구했다. 그 결과 7월 10일 임시정부가 전담하기로 결의되었다.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임시사료편찬회가 구성되었다.


총재 안창호
주임 이광수
간사 김홍서
위원 김병조
위원 이원익
위원 장붕
위원 김한
위원 김두봉
위원 박현환
위원 김여제
위원 이영근
조역 우승규 외 21인




제1부: 고대~1876년 병자수호조약까지의 한일관계사 제2부: 병자수호조약~1910년 병합까지의 조약·정치·종교 탄압 제3부: 1910~1919년 2월까지의 식민지 통치 정책 제4부: 3·1운동 관련 사료(2·8독립선언 등 17개 문서 원문 포함)

ⓒ독립기념관

임시사료편찬회 구성원들
김한·우승규·이광수·김두봉·김병조(앞줄 왼쪽부터)
이원익·장붕·(미상)·안창호·김여제·김홍서·박현환(뒷줄 왼쪽부터)

하지만 편찬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1919년 9월 1일 전에 초고를 완성해야 하는 긴박한 일정, 국내·일본 자료의 수집 난항, 전문 인력 부족 등 난제가 겹쳤지만, 위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작업을 진행했다. 약 40일 만인 8월 중순, 1차 정리가 일단 마무리되었다. 그 결과는 4부 총 739쪽에 달하는 대규모 사료집이었다.
특히 제2부에는 병자수호조약에서 합병늑약에 이르는 한일 간 주요 조약 원문을, 제4부에는 독립운동 관련 문서를 원문 그대로 수록해 객관성과 사료적 정밀성을 확보하려 했다. 이는 국제사회에서 ‘편파적 주장’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다만, 인쇄 시설 부족으로 활판 인쇄가 불가능해 9월 23일 등사본 100질이 제작된 것이 전부였다. 형식상 “정식 사료집”이라기보다는 “국제연맹 제출을 위한 자료집 초판” 성격에 가까웠다. 그래서 명칭도 ‘사료집’, ‘국제연맹 제출 조일관계사료집’, ‘한일관계사’ 등으로 혼재했다.
등사본이 발간된 시점은 마침 김규식이 파리에서 돌아온 직후(9월 중순경)였고, 그의 미국행이 좌절되면서 사료집은 국제연맹 무대에서 실제로 활용되지는 못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료편찬종료」,
『독립신문』 제15호(1919. 9. 30.)

『한일관계사료집』의 역사적·사학사적 의의

이 책은 대개 『한일관계사료집』이라 불리지만, 그 이름은 다양했다. 전체 4권 모두 시작 부분에 『사료집史料集』이라 기록되었지만, 정작 책 목차 앞에는 『국제연맹제출國際聯盟提出 조일관계사료집朝日關係史料集』이라 적혀 있다. 또 제1권 표제로 『한일관계사』라는 이름도 붙어있고, 발간 사실을 보도한 『독립신문』 1919년 9월 29일 자 기사에는 ‘한일관계사료집’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어 있다. 이처럼 정리되지 못한 것은, 여러 사람이 집필한 이유도 있지만, 정식 사료집 간행이 아닌 ‘자료 정리·초고 수준의 작업’이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비록 국제연맹에서 실질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으나, 『한일관계사료집』은 임시정부가 남긴 최초의 공식 사료집이자 역사서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는 이후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의 자료적 기반이 되었고, 3·1운동의 최초의 공식 기록자 역할을 수행했다.
더 나아가 일제의 『Annual Reports on Reforms and Progress in Chosen(조선의 개혁과 진보에 관한 연례보고서)』이라는 국제홍보·여론조작에 맞선 임시정부의 ‘문헌전文獻戰’이며, 식민 지배의 불법성과 한국 독립의 역사적 정당성을 체계적·객관적 자료로 증명하려 한 지식·사료 기반의 항일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요컨대 『한일관계사료집』은 파리강화회의 실패 이후 임시정부가 국제질서의 흐름을 읽고, 사료와 논거로 무장한 새로운 외교 노선을 구축한 지적·정치적 산물이었다. 이는 독립운동사가 ‘무장투쟁만이 아니라 지식·문헌·외교를 포괄한 다층적 투쟁’이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