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박은식의
역사관과 역사서
특집
박은식의
역사관과 역사서
— 글.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위원)
백암白巖 박은식(1859~1925)은 1859년 황해도 황주군 남면의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무렵 세상은 급격한 변동으로 소용돌이치던 시대였다.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청나라는 아편전쟁과 연이은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 조약 체결로 더 이상 지위를 유지할 수 없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산업·군사·정치 전반에 급속한 변화를 이루었으며, 근대화에 성공했다. 반면 조선은 봉건체제의 틀 안에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면서도 나아갈 방향을 찾지 못한 채 흔들리고 있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박은식이 주필로 활동했던 『대한매일신보』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던 박은식은 열 살이 되어서야 학문에 입문했지만,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깨닫는다’는 말을 들을만큼 총명했다. 십대 후반에는 이미 황해도 일대에서 신동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러한 총명함은 그를 평화로운 학문의 세계에 머무르게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이 처한 현실을 더 깊이 성찰하게 하는 동력이 되게 만들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등 조선 사회가 붕괴 직전의 혼란을 겪는 과정에서 그는 점차 성리학적 명분론으로는 현실 위기를 구할 수 없다는 자각에 이르렀다. 그 자각은 이후 그의 사상적 전환을 이끄는 동력이 되었으며, 결국 위기의 시대에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는 계몽사상가이자 언론인, 나아가 독립운동가로 변화시키는 기초가 되었다.
1898년 서울로 올라온 그는 새로운 서구 문물과 만나면서 큰 충격을 받았다. 루소, 몽테스키외, 스펜서, 량치차오 등의 사상은 그로 하여금 국가란 무엇이며, 조선은 어디로 가야하는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 그는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하며 본격적으로 계몽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교육이 국권 회복의 근본이며, 민족정신國魂이 살아있어야 나라가 산다”고 역설했다. 그에게 신문은 단순한 정보 전달 매체가 아니라 “잠든 민족혼을 깨우는 각성의 도구”였다. 그는 기사와 논설을 통해 의무교육 도입, 사범교육 확충, 산업 진흥, 여성 교육 확대 등을 강조하며 국민의식의 근대화를 촉구했다. 이러한 주장은 대한제국 말기 외세의 침략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해가던 조선 민중에게 자각과 연대를 호소하는 정신적 울림이었다.
특히 그는 ‘국혼 보존’을 강조하며, 민족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것이 어떤 근대화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근대화라는 외형적 체제 정비보다 먼저 민족정신의 확립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박은식의 사상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신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연세대학교 박물관
『발해태조건국지』
1905년 을사늑약,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거치며 조선은 마침내 국권을 상실했다. 박은식은 “나라의 형체國體는 없어져도, 나라의 혼國魂이 살아 있는 한 민족은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주장하며 역사 서술을 국혼 회복의 방법으로 삼았다. 국내에서 더 이상 계몽운동을 지속하기 어려운 현실을 마주한 그는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만주, 연해주, 상하이 등지에서 『천개소문전泉蓋蘇文傳』, 『명림답부전明臨答夫傳』, 『발해태조건국지渤海太祖建國誌』, 『몽배금태조夢拜金太祖』,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등의 역사서를 집필해 고대사 속의 영웅들의 삶을 조명했다. 이러한 작업은 일제가 왜곡한 역사에서 민족의 자존을 회복하는 정신적 투쟁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지적·도덕적 열등성을 강조함으로써 침략을 합리화했으며, 식민사관을 통해 조선이 자립으로 근대화 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박은식은 이에 맞서 우리의 역사에 실재했던 영웅적 기상과 자주적 정신을 발굴해 후세 청년들에게 “독립의 의지”를 심어주려 했다. 그에게 역사는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민족을 살리는 무기’였다.
『한국통사』
1915년 상하이에서 발간된 『한국통사韓國痛史』는 제목 그대로 “통한의 역사”다. 박은식은 조선 몰락의 원인을 냉정하게 진단하며 당쟁, 사대주의, 개혁 실패, 국제정세 오판 등을 기록했다. 하지만 『한국통사』의 목적은 단순히 과거의 실책을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민족이 스스로 돌아보고 각성하기 위해 고통스러운 실패의 역사를 정면으로 드러냈다. 일본의 침략 과정과 조선 조정의 무기력을 낱낱이 묘사하며, “우리 스스로가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성의 메시지를 반복해 강조했다. 그는 나라를 잃은 이유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야말로 부활의 첫걸음이라고 보았다. 그는 ‘우리가 왜 망했는가’에 대해서 절절하게 반성하는 마음으로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했다. 뼈아픈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국혼만 살아 있다면 국가는 반드시 재건할 수 있다”라는 확신으로 이 책을 집필했다. 그는 침략의 전개 과정, 국제 정세를 읽지 못한 조선의 판단 착오, 민중들이 겪은 고통 등을 상세히 기록함으로써, ‘민족정신의 상실이 국가의 몰락을 초래했다’라는 역사적 교훈을 제시했다. 『한국통사』는 망국 민족이 다시 일어서기 위한 부활을 준비하는 교과서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1920년에 간행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3·1운동 이후 우리 민족이 고귀한 피로써 투쟁한 역사를 기록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3·1운동을 혁명으로 규정하고,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와 일제의 잔혹한 탄압을 구체적인 수치와 사례로 제시했다. 각 지역의 시위 횟수, 시위 규모, 참가자 수, 희생자·부상자 수 등을 가능한 한 정확하게 기록해 후세 사람들이 독립운동의 실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독립운동가들의 희생이 민족의 생존을 건 숭고한 투쟁이었음을 세계에 알리고자 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망국의 터널 끝에 선 민족에게 부활의 희망을 전하는 기록이자, 세계사적 정의 앞에서 한국인의 투쟁을 증언하는 역사적 산물이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박은식은 외교, 교육, 선전 등 다양한 업무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기반을 제공했다. 그의 역사관은 임시정부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핵심 논리가 되었다. 그는 국혼의 보존이 곧 국가의 정통성을 확립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관점은 임시정부가 조선의 법통을 이어가는 유일한 기관이라는 명분을 더욱 굳건하게 했다. 1925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박은식은 노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지키고 조직을 재정비하는 일에 온 힘을 기울였다. 당시 임시정부는 재정난·노선 분열·외교적 고립 등 여러 난관에 봉착해 있었지만, 그는 민족정신을 결집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독립운동 단체들 사이의 갈등을 조정하고, 중국 국내외의 정세 변화에 맞추어 독립운동 전략을 모색하는 등 정치적·사상적 지도자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그는 임시정부의 교육 사업, 청년 조직 육성, 독립운동사 정리 등을 통해 “민족정신의 기반을 마련하는 일”을 독립운동의 필수 요소로 보았다. 그에게 독립운동은 총과 칼로만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민족정신을 살려내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독립운동 전략이라고 보았다. 박은식은 평생 국혼을 되살리려는 노력으로 수많은 역사서를 집필했으며, 이 책들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국혼을 보존한다면 반드시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주었다. 그는 역사를 제도와 사건의 나열로 보지 않고, 민족정신이 어떻게 계승되고 변모해 왔는지를 읽어내는 정신사로 보았다. 이 관점에서 그의 모든 역사서는 국혼을 지키고 회복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그는 역사를 행동을 통해 실천하는 학문으로 보았다. 그의 역사서는 민족이 현실을 직시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만드는 정신적 무기였다. 그는 외세의 압력에 의해 강요된 근대화가 아니라, 교육·문화·도덕을 바탕으로 한 내재적 근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오늘날 사회 일각에서 주장되는 민족정신을 망각하고, 계량화 된 수치로 역사를 설명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요한 가르침이다.
박은식 역사학의 핵심은 ‘국혼’에 대한 신념이었다. 그는 국혼이야말로 민족 존재의 근거이며, 나라를 잃고도 민족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라고 보았다. 이 신념은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철학이기도 했다.
그는 중국 망명지에서 만년이 되어서도 집필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의 삶을 민족의 정신적 재건에 모두 바쳤다. 그의 마지막까지 이어진 역사 집필은 단순한 학문 활동이 아니라 조국 독립을 위한 정신적 투쟁이었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술과 정신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형성하는 데 여전히 살아 있는 토대가 되고 있다.
박은식의 역사서와 사상은 단순히 지나간 시대의 기록이 아니다. 『한국통사』의 통한과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절규는 일제강점기라는 비극적 현실을 넘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전한다. 그가 역사 속에서 찾고자 했던 것은 단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민족이 흔들릴 때 우리를 붙들어 세우는 정신의 힘, 즉 ‘국혼’이었다. 다변화된 국제 질서와 빠른 변화 속에 놓여 있는 청년들에게 박은식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자신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현실의 위기를 외면하지 말며, 스스로 변화의 주체가 되라.” 그는 역사를 망각하는 순간 공동체의 미래 또한 흔들린다고 경고했다. 박은식이 말한 ‘역사는 정신’이라는 명제는, 오늘날 글로벌 경쟁과 정보 과잉 속에서 방향을 잃기 쉬운 우리에게 더욱 절실한 지침이 된다. 과거의 경험과 선열들의 투쟁은 현재의 나를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토대이며,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길을 비추는 나침반이다. 결국 그의 역사관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남긴다. “나는 지금 어떤 정신을 품고,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가.”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오늘의 나를 세우고 내일의 공동체를 지탱하는 살아 있는 정신적 자산임을 다시금 일깨워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