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자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한일관계사료집』 편찬과 의의
— 글. 김용달(광복회학술원장)
역사 편찬의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사실을 현재나 미래의 교훈으로 삼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과거로부터 미래를 비추는 빛이자, 현재의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거울이다. 현재의 자기 정체성을 인식하기 위해서도, 미래의 모습을 전망하기 위해서도 역사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이다.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역사의 중요성을 “유사유국有史有國이요 무사무국無史無國”이라고 했다. 한마디로 “역사가 있으면 나라가 있고, 역사가 없으면 나라도 없다”는 것이다. 1908년 5월 25일 자 『대한협회회보』 제2호에 실은 「역사와 애국심의 관계」라는 글에서 신채호는, “역사가 없으면 반드시 나라를 잃게 되니, 지금까지 존재하며 지금까지 강대한 나라는 모두 역사가 있는 나라”라고 갈파했다.
서구인들도 같은 생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윈스턴 처칠(1874~1965)도 회고록에서 “역사를 잊은 나라에는 미래가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 더해 고난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오직 절망만 남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도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제 국가로 국내외 동포들과 함께 새로운 역사를 창조해가는 정부였다. 그래서 임시정부의 수립 이유와 당위성, 나아가 임시정부 수립 전후 국내외 동포들과 함께 경험한 역사를 기록할 필요가 있었다. 바로 임시정부가 1919년 7월 임시사료편찬회를 설치한 이유이다.
『한일관계사료집』
ⓒ독립기념관
임시사료편찬회 구성원들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하 임시의정원)은 정부 수립 직후에 사료편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1919년 5월에 열린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국무위원 조완구가 시정방침을 발표하면서 3·1운동 이후 전개된 역사를 편찬하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이는 3·1운동으로 표출된 한국 민족의 독립의지를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려는 의도에서 나왔다.
더욱이 파리강화회의가 같은 해 6월 말로 끝나면서 국제연맹의 창설이 진행되고 있었다. 여기에 제출할 임시정부의 역사서가 필요했다. 임시정부를 국제연맹 회의에서 공인 받기 위해 고대로부터 현재까지 한일관계사를 정리해 제출할 시급한 이유가 생긴 것이다.
임시정부의 의지는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구체화되었다. 곧 7월 8일 열린 회의에서 내무총장 안창호의 시정방침에 관한 연설을 통해서이다. 그는 국제연맹에 제출할 안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자료 조사를 위한 대표 파견과 편찬 작업의 진행, 그리고 『한일관계사료집』 작성 필요성 등을 역설한 것이다.
특히 안창호는 「임시정부 진행방침」의 하나로 ‘자래自來로 한일의 관계를 국무원에서 조사 편찬 중’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이 사실은 임시정부가 국제연맹에 제출할 목적으로 이미 ‘한일관계사’ 편찬 준비에 들어가 있던 사정을 말해준다.
제5회 임시의정원 회의는 국제연맹에 제출할 안건을 협의하기 위해 소집한 만큼, 이에 대한 논의를 거쳐 임시의정원이 아닌 임시정부가 주체가 되어 국제연맹에 안건을 제출하기로 결의했다. 이어 7월 11일 회의에서 특별위원 김병조·오의선·최창식·정인과·이춘숙 등 5인을 선출해 ‘국제연맹회제출안건작성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때 임시정부의 방침이 확정되고 안건이 준비되는 한편, 『한일관계사료집』 편찬 작업도 착수된 것이다.
임시사료편찬회 설치는 내무총장에 취임해 국무총리를 대행하던 안창호가 주도했다. 총재는 안창호, 주임은 이광수, 간사는 김홍서, 위원으로는 김병조·이원익·장붕·김한·김두봉·박현환·김여제·이영근 등 8인, 조역으로는 김석황과 김명제 등 22인이 참여했다. 이들 33인의 위원들이 10월 열릴 예정인 국제연맹 회의에 제출하기 위해 서둘러 만든 역사서가 『한일관계사료집』이다.
1919년 7월 초순부터 활동을 시작한 임시사료편찬회는 8월 하순에 『한일관계사료집』 편찬 작업을 마무리했다. 시간이 부족해 활판 인쇄를 못하고 여러 명의 위원들이 직접 손으로 등사하는 필경筆耕 작업으로 9월 23일 100질을 완성한 것이다. 집필부터 등사까지 불과 80여 일 만에 완성된 셈이다. 『독립신문』은 이러한 사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안창호씨를 총재로 하고 이광수씨를 주임으로 한 임시사료편찬회는 8명의 위원 23명의 조역의 연일 활동으로 본년(1919) 7월 2일에 시始하여 9월 23일에 한일관계사료집의 편찬 급及 인쇄를 종료하다. 해該 사료집은 국제연맹의 제출할 안건에 대한 참고의 목적으로 편찬됨인데 차此를 4책에 분分하여 합100질을 완성하다.
「사료편찬 종료」, 『독립신문』 (1919. 9. 29.)
『한일관계사료집』은 4부 739쪽으로 구성되고, 국배판 크기 필경으로 간행되었다. 제1부는 고대로부터 1876년 병자수호조약에 이르는 한일관계사, 제2부는 병자수호조약 이후 1910년 경술국치까지의 한일관계사, 제3부는 경술국치 이후 3·1운동 직전인 1919년 2월까지 일제의 식민지 지배정책, 제4부는 3·1운동의 정형情形을 기술한다고 계획되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제2부에서 경술국치 이후 사실을 언급하는 등 애초 계획과는 약간 차이를 보이는 경우도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사료편찬종료」, 『독립신문』 제15호(1919. 9. 30.)
제1부는 삼국시대 초기부터 ‘합병 후의 사정 일반’까지 한일관계사를 편년 순서로 정리한 것이다. 1. 자自삼국지至고려말, 2. 풍신수길의 임진년 입구入寇, 3. 광무황제 즉위 후사後事, 4. 갑신혁명당의 난, 5. 조일조약 유취類聚 등 5장으로 구성되었다. 일본의 한국 침략사 관점에서 침략성을 부각하고, 문화를 전파시켜준 은인을 도리어 배신한 부도덕성을 강조하며, 일본에 대한 한국 전통문화의 비교 우위를 기술한 것이다.
제2부는 한국이 일본에 병탄되거나 지배를 받아서는 안 되는 이유를 역사와 문화적으로 규명한 것이다. 1. 민족 급及 국민성의 차이, 2. 한족韓族의 일본족에 대한 경멸, 3. 한족의 일본족에 대한 원한, 4. 한족의 일본족에 대한 불신임, 5. 한족의 민족력, 6. 집회 급 결사, 언론 출판의 금지, 7. 종교 압박 등 7장으로 구성되었다. 한일 두 민족은 국민성이 다르고 한국 민족은 일본인들을 경멸하며 원한을 지녀 왔을 뿐만 아니라, 산업과 문화면에서도 절대로 일본에 병탄될 수 없는 이유를 실증적인 사례를 통해 설명한 것이다.
제3부는 경술국치 이후 3·1운동 봉기 직전까지 일제 식민지 수탈과 탄압의 실상을 구체적 자료를 근거로 기록한 것이다. 1. 관공서의 한인 배척 급 차별대우, 2. 동양척식회사, 3. 회사령 급 조합 조직, 4. 광산 잠견 급 제조공업의 독점, 5. 조선인 사유재산의 감시, 6. 법령에 드러난 일본의 조선인 교육의 종지宗旨, 7. 행정, 8. 사법, 9. 경찰 등 9장으로 구성되었다. 임시정부 관계자들이 직접 보고 경험한 사실과 실증적 자료를 통해 일제 식민통치의 잔학상을 기술했다. 또한 일제의 교묘한 선전으로 국제사회에서 식민통치의 실상이 크게 왜곡된 상황을 객관적인 자료로 낱낱이 반박한 것이다.
제4부는 3·1운동의 원인과 경과 그리고 결과를 총망라하고, 부록 형식으로 「독립운동일람표」를 정리 기술한 것이다. 1. 거사의 원인, 2. 거사의 내력, 3. 독립운동에 관한 약사, 4. 독립운동의 형편, 5. 한인의 일인에게 대한 적개심, 6. 일본의 허위적 전파, 7. 독립운동에 관한 서류, 별부別附 독립운동일람표 등 7장 1부록으로 구성되었다. 이는 3·1운동사에 대한 당대의 최초 정리이자 임시정부의 공식기록이란 점에서 사학사적 의의가 크다. 특히 부록으로 수록된 독립운동일람표는 3·1운동에 대한 최초의 통계로 임시정부에서 역사 편찬을 주도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김병조의 『한국독립운동사략 상편』 저술에도 기본 자료로 인용되었다.
『한일관계사료집』은 84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편찬됨에 따라 여러 가지 한계도 있지만, 한국근현대사나 한국독립운동사, 그리고 한국사학사에서 가지는 가치와 의미는 크다.
첫째,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식적인 최초의 사료집이자 역사서라는 점이다.
둘째, 임시정부의 의도를 잘 보여주는 역사서라는 점이다. 국제사회에 일제의 침략과 포악한 통치 실상을 알릴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한국이 일제의 식민지가 될 수 없다는 역사적 사실과 논리를 제시하는 점에서 그렇다.
셋째, 침략과 통치를 합리화하는 일제의 식민통치미화론에 맞선 독립운동 역사서라는 점이다.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실증 자료와 반反침략 논리로 설명하는 역사서 편찬은 항일투쟁의 하나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넷째, 객관적이며 실증적 자료를 제시해 편찬한 근대 역사서라는 점이다. 이는 국제사회에 한민족이 당하는 식민통치의 실상을 널리 알려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객관적이며 실증적 자료 제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근대 역사서로서 덕목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다섯째, 사학사적으로 지대한 의의를 가진 역사서라는 점이다. 우선 3·1운동에 대한 당대의 역사 기록이자 첫 공식기록이고, 일제 침략으로 단절된 관찬 사서 편찬의 전통과 맥락을 계승했다. 나아가 민주공화제 시기의 최초 관찬 역사서라는 사학사적 의의를 갖고 있다. 따라서 『한일관계사료집』은 단순한 역사서가 아니라, ‘일제의 한국침략과 한민족의 항일투쟁사’, 혹은 ‘항일독립운동사’라고 인식해야 하고, 그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마땅하다.
임시사료편찬회는 『한일관계사료집』의 완성과 함께 해산되었지만, 임시정부의 사료 조사와 편찬 사업은 계속되었다. 1919년 9월 2일 개최된 임시국무회의에서 국무원에 조사과를 설치해 사료 조사와 선전 자료를 편찬하도록 결의했다. 역사 편찬 업무는 국무원이 맡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에 「한국독립운동사」와 「독립운동일지」가 연재되어 국내외 동포들에게 큰 힘을 주었다.
특히 1915년 『한국통사』를 편찬한 백암 박은식이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했다. 『한일관계사료집』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일제 침략의 ‘아픈 역사’ 즉 ‘통사痛史’와 함께, 여기에 격렬하게 저항한 ‘육탄 혈전의 역사’ 곧 ‘혈사血史’가 탄생함으로써, 독립운동 내내 조국광복의 빛과 등불이 된 것이다.
©독립기념관
『한일관계사료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