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인물들
머나먼 타향에서 나라의 독립을 노래하다:
상해판『독립신문』에 시가를 게재했던 사람들과 그들의 내면 들여다보기
― 글. 문일웅(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1919년 3·1운동 이후 중국 상하이는 한국 독립운동의 최대 거점이 되었으며, 이곳에는 국내외 각지에서 여러 지사와 교민들이 모이게 되었다. 상하이가 한국 독립운동 중심지가 된 것은, 이곳에 한국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기관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운동 대표 기관으로서의 위상을 지녔으며, 동시에 상하이에 거주하던 교민 1,000여 명의 실질적 구심점 역할을 하기도 했다. 특히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상해판 『독립신문』(이하 『독립신문』)은 신문 지면을 매개로 상하이 거주 한인 지사와 교민들을 결속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비록 국내외 독립운동의 중심 역할을 자임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었던 상하이였지만, 이곳에 모인 다양한 성향의 지사들은 독립운동의 방략을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이거나 대립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의 대표격으로는 1923년의 국민대표회의라 할 수 있지만, 『독립신문』 지면을 보면 상하이 한인 사이에서 크고 작은 의견 대립이 항시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임시정부나 상하이 한인 사회가 파탄을 맞이하지 않고 면면히 이어 나갈 수 있었던 까닭은 아마도 논쟁 당사자들끼리 국가의 독립에 대한 감정만은 공유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에 접근하려면 이들 간에 보였던 독립 방략에 대한 편차나 그 장단점을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한편으로는 그럼에도 이들을 결속시킬 수밖에 없었던 감성적 측면은 어떠했는지를 파악하는 것도 현재의 한국인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립신문』은 상하이 한인들의 소식지였으므로 이들 내면을 파악하는 데 좋은 매개가 될 수 있다. 물론 이 신문에 게재된 이성적인 논설이나 건조한 르포르타쥬를 통해 상하이 한인들의 감정에 접근할 수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문학은 언어를 매개로 인간 감정을 표출하며, 이 가운데 시가詩歌는 좀 더 원초적인 감정과 맞닿아 있는 문학 장르이다. 그러므로 『독립신문』에 게재된 시가를 통해 우리는 상하이에 건너간 여러 한인들의 내면을 간접적으로나마 파악해 볼 수 있다고 하겠다.
『독립신문』에 게재된 시가는, 연구자마다 각기 다른 기준으로 분류하고는 있지만, 대략 국문 시가가 100여 편, 한시漢詩가 80여 편으로 확인되고 있다. 국문 시가는 시조時調, 창가 가사, 신체시新體詩, 자유시, 산문시 등이 포함되었으며, 한시 역시 다양한 양식이 확인된다. 같은 시기 국내에서 발간되던 여러 매체와 비교해 본다면 『독립신문』 지면에는 다양한 형식의 시가가 공존하고 있었다. 이는 『독립신문』이 국내 매체와는 달리 총독부 당국의 검열에 신경 쓰지 않고 다양한 한인들의 글과 시가를 게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신문』이 간행될 무렵 대부분의 한국인은 문학을 계몽의 도구로 인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주지하듯 계몽啓蒙이란, 부조리한 현실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세상을 만들자는 지적 운동이다. 그렇기에 『독립신문』 지면에는 유미주의唯美主義 사조나 여흥의 정서를 강조하는 시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한가롭게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독립신문』에 게재된 대부분의 시가에는 공통적으로 나라의 독립을 염원하는 정서가 깔려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 시가 창작자가 느꼈던 정서, 예컨대 고향을 그리워하는 정서, 타국에서의 애환,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람에 대한 찬가나 추모, 각종 기념일에 대한 단상들이 덧입혀져 있었다. 『독립신문』에 게재된 시가가 지닌 이러한 특징들은 신문사 측이 선별한 결과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나라 없는 국민으로서 고된 타향살이를 해나가던 상하이 한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와 크게 달랐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의 고달프고도 험난한 생활의 근본적인 원인이 나라 없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렇기에 국가 독립에 대한 염원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의 발로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립기념관
임시사료편찬회 시절 이광수
「팔 찍힌 소녀」, 『신한청년』 창간호 (1919. 12. 1.)
『독립신문』에 게재된 시가 가운데는, 신문사 초대 사장인 이광수의 사례처럼, 전문 작가나 기성 문인들이 남긴 것도 다수 존재했다. 지면 관계상 이 부류의 투고자 모두를 소개할 수 없겠기에 그 대표격으로 이광수(1892~1950)와 김여제(1900~1968)를 소개하고자 한다.
먼저 이광수를 살펴본다면, 이광수는 도쿄 유학 시절 2·8독립선언에 가담하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렇기에 그는 2·8독립선언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국내 3·1운동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이광수는 『신한청년』에 자유시 「팔 찍힌 소녀」, 동요童謠 「만세」, 시조 「경성 및 의주 공동묘지에서 밤에 원혼 만세와 곡소리가 들리다」 등을 게재했다. 이 시들은 그가 얼마 후 『독립신문』에 3·1운동 당시 희생된 학생들을 기리기 위해 연재했던 소설 「피눈물」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병중음사수」, 『독립신문』 제41호(1920. 1. 31.)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원단삼곡」, 『독립신문』 제89호(1921. 1. 1.)
또한 이광수는 일제가 자행한 간도참변의 소식을 듣고 그 충격을 시가로 창작하기도 했다. 그는 간도참변 소식이 속속 상하이에도 전달되던 1920년 12월, 『독립신문』 지면에 「3천의 원혼」, 「저 바람 소리」, 「간도 동포의 참상」을 게재했다. 이광수는 이 일련의 시를 통해 일본군의 만행으로 비참한 신세가 된 간도 동포들에 대한 애도, 그리고 그들이 겪었던 참상에 대한 공감을 유감없이 표출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광수는 「병중음사수病中吟四首」나 「원단삼곡元旦三曲」 등의 시조, 그리고 자유시인 「광복기도회」를 통해 망명 생활의 애환을 노래하며 귀국을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광수와 더불어 김여제의 시가도 주목할 만하다. 일본 유학생 출신이었던 그는 3·1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일제 관헌에게 쫓기게 되었고, 1919년 5월 상하이로 망명해 1921년 8월 미국으로 유학하기 전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던 인물이었다. 해방 이후 그는 교육자로 활동하였지만, 상하이에서 망명 생활을 할 당시는 「만만파파식적萬萬波波息笛을 울음」 등의 시를 남긴 문인으로 알려진 상태였다. 이 시는 근래 다수의 국문학자들로부터 주요한의 「불놀이」를 대신하는 한국 최초의 자유시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김여제가 『독립신문』 지면에 투고한 시가는 7편으로 확인되는데, 이는 각각 「독립일」, 「아아 경술 8월 29일」, 「오오 나라의 한아바지들」, 「추석」, 「아아 내나라」, 「3월 1일」, 「향수」였다. 그의 시가 역시 앞서의 이광수의 것과 마찬가지로 망국의 비애와 국가 독립의 염원, 그리고 3·1운동의 의의를 되새기거나 외국 망명 생활의 애환을 노래하고 있었다. 그의 시가는 당대 국내보다 자유로운 창작 환경 속에서 이광수의 것보다 더욱 현장성과 운동성, 그러면서도 서정성을 놓치지 않은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광수, 김여제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듯, 『독립신문』 지면에 투고한 전문 작가나 기성 문인들은 시가가 지닌 원초적인 힘을 잘 알고 있었다. 이들은 감정을 단순히 감정으로만 소모하지 않고 자신의 시가로 독자를 격동시키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그렇기에 전문 작가 및 기성 문인 출신들의 시가는, 당시 상하이 한인들의 정서가 향후 독립운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는 의의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김여제
「추석」, 『독립신문』 제23호(1919. 10. 28.)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향수」, 『독립신문』 제75호(1920. 5. 11.)
『독립신문』 지면에서는 앞서 살펴본 문인 전문 작가나 문인 출신 필자들보다 비문인 투고자들의 시가가 압도적으로 많이 실렸다. 또한 무기명으로 게재되거나, 필명으로 인해 작가를 특정할 수 없는 경우도 상당수로, 실명으로 확인되는 시가보다 훨씬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부 연구자들이 이 미상 작가들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여러 추정을 제기한 바 있으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 근거가 부족해 『독립신문』 시가의 다수는 여전히 작가가 미상인 상태로 남아 있다. 다만 단편적인 근거를 통해 윤해(1888~1939), 조동호(1892~1954), 차리석(1881~1945) 등 신문 편집과 발간에 관여했던 인물들이 주요 기고자였을 것이라는 정도만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이 밖에도 안창호(1878~1938), 김인전(1876~1923)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의 시가가 게재되었음이 확인된다.
『독립신문』에 실린 무기명·비문인 창작 시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강렬한 감정의 직접적 토로였다. 이를 뒷받침하는 단서로 1920년 4월 27일 자에 실린 「시평일속時評一束」을 들 수 있다. 필자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으나 전문 작가로 보기 어려우며, 그는 이 글에서 “일본 직수입의 예술론”은 잠시 제쳐두고, 당시 한국인의 정서를 격동시켜 독립운동의 추진력을 확보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는 당시 일본 문예사조의 영향을 크게 받았던 기성 문인층의 창작 태도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반영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실제로 비문인 작가들의 시가는 기성 문인층의 창작 경향과 달리, 당대 유행한 새로운 문예사조를 따르기보다 시조·한시 등 전통적 형식을 채택한 경우가 많았다. 전업 작가가 아니었고 체계적인 창작 교육을 받은 이력도 확인되지 않으므로 이들 작품의 구조적 완성도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의 시가는 외형적 미감보다 감정의 폭발적 표출을 우선시했으며, 그로 인해 세련된 수사보다 생생한 현장성과 진정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진솔한 정서는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염원을 공유하고 있던 독자들에게 강한 공감을 이끌어 냈다.
앞서 언급했듯이, 『독립신문』에 실린 시가의 상당수는 실명 기록이 없는 무명 작가 혹은 비문인 필자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들 시가의 밑바탕에는 공통적으로 조국 독립을 향한 간절한 열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독립신문』의 시가는 3·1운동 이후 상하이를 비롯한 국외 한인 사회에서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수많은 지사들이, 머나먼 타국에서도 각자 조국의 광복을 염원하며 공유했던 정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자료라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독립운동 현장의 심리와 정동情動을 생생히 전하는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독립기념관
안창호
@국가보훈부
김인전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시평일속」, 『독립신문』 제70호(1920. 4.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