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신규식과 『한국혼』에 담긴 민족정신
특집
나라를 잃은 이유를 묻다 신규식과 『한국혼』에
담긴 민족정신
— 글. 유지혜(국회박물관 참관전시담당관실 주무관)
예관睨觀 신규식申圭植(1880~1922)은 한일강제병합 이후 중국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는 신규식의 공이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동제사, 신아동제사, 신한혁명당, 대동단결선언, 신한청년당 등을 통해 펼친 활동은 파리강화회의 대표 파견, 나아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까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망명 후부터 임시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활약한 그는 이 격변의 시기에 조국의 운명을 성찰한 『한국혼韓國魂』을 동시에 저술했다. 앞서 열거한 그의 활동은 일일이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많으므로 이 글에서는 『한국혼』에 집중하고자 한다.
©독립기념관
1906년 대한제국육군무관학교 장교 시절 신규식(앞줄 오른쪽)
신규식은 대한제국기 육군무관학교에서 군인으로 복무하며 서양의 근대적 군사체계를 경험하고, 관립한어학교에서 외국어를 배우며 근대 지식을 습득했다. 관립한어학교에서는 외국어 수업뿐 아니라 『조선역사』, 『조선역대사략』, 『동국역대사략』 등을 접하며 역사서에도 몰입했다. 군대 해산 후에는 학회 활동 등 실업구국운동에 참여함으로써 서양의 근대 학문과 기술을 통한 국가 부강을 다각도로 모색했다. 이러한 경험들은 그가 근대적 방법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노력했던 전형적인 전환기 지식인의 한 유형이었음을 나타낸다.
당시 많은 지식인이 그러했듯 신규식 역시 서양의 문물과 제도를 익혀 부국강병을 이루는 것이 국권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군사 교육을 받고 외국어를 익히고 실업을 일으키는 것, 이 모든 것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과정으로 여겨졌다. 그가 탐독한 역사서 또한 과거를 통해 현재의 위기를 타개할 교훈을 얻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1910년 경술국치는 이 모든 노력을 무너뜨렸다. 중국으로 망명한 신규식은 식민지화로 인한 조국의 소멸이라는 정신적 상처를 안고 망국의 이유를 끊임없이 되새기며 괴로워했다. 고국을 떠난 지 수년이 흐르는 동안, 그는 중국에서 세계 소식을 접하며 중국의 혁명가들을 만나고 자신이 가진 자금으로 한국 청년들을 교육·훈련시키면서도 망국의 아픔을 곱씹었다. 그가 내린 결론은 더 근본적인 민족의 정신, 즉 ‘혼’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었다.
『한국혼』
망명 후부터 시작한 구상을 1912년에 마치고 1914년 완성된 『한국혼』(일명 『통언痛言』)은 이러한 전환의 산물이었다. 『한국혼』은 국망의 시기에 망명 지식인이 한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일종의 통사通史에 속한다. 다만 연대기적 서술이 아니라 주요 역사적 사건에 따라 그의 사관을 드러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에, 사史대신 언言을 사용해서 『통언』이라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신규식은 민족의 정신과 역사 속 영웅에서 해답을 찾고자 했다. 그는 망국의 원인을 양심의 상실로 인한 ‘건망증’으로 진단했다. 우리가 잊어버린 것은 네 가지였다. 첫째, 단군의 교화敎化와 세속오계 같은 선조의 가르침, 둘째, 이순신과 거북선 같은 선민先民의 공렬功烈과 이기利器, 셋째, 우리의 국사國史, 넷째, 임진왜란과 을미사변 등의 국치國恥였다. 이러한 건망증이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한국혼』에서는 특히 이순신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이고 있다. 일본 해군 기록을 인용하며 이순신은 영국의 넬슨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강조하고, 영국 해군 기록을 들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철갑선을 만든 것은 조선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작 조선은 이순신을 모함하고 거북선을 방치해 썩게 했으며, 문文을 중시하고 무武를 경시하는 중문경무重文輕武의 폐습 아래서 무장을 박해하고 국방을 소홀히 해 망국을 자초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이순신 서술에는 단조로운 역사서술을 넘어선, 영웅의 부재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 한말 이순신 관련 저서들이 출간되고 신규식 또한 영웅 전기를 휴대하고 다녔던 사실은, 당대 위기를 타개할 영웅을 누구보다 원했음을 알 수 있다. 좌절 속에서 그는 역사 속 이순신에게서 그 상징을 찾았고, 나아가 한국인의 마음속에 살아있는 ‘한국혼’이야말로 진정한 구국의 열쇠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물리적인 힘이나 제도가 아니라, 정신과 의지가 민족을 부활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의 전환이었다.
이러한 민족정신 중심 전환의 이면에는 대종교의 영향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1911년 대종교의 지교知教에 오른 신규식은 어천절, 개천절 기념식에 참석하고 국권 상실의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8월 29일 국치 기념식을 거행했다. 그는 단군 초상화와 한국 지도를 들고 다니며, 아침 저녁으로 단군 영정에 경배를 올리고 조국 광복을 기도했다고 한다. 박달학원에서 박은식, 신채호, 홍명희, 문일평 등과 함께 교편을 잡고, 단군 사상을 교육에 반영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실제로 『한국혼』의 내용은 박달학원의 교재로 사용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혼」, 『신한민보』(1940. 10. 17.)
대종교의 단군 사상은 해외로 흩어진 한국 디아스포라를 연결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신규식은 ‘동포가 하나 되고 일제와 싸워 국권을 회복하려면 국조 단군을 구심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는 지리적으로 흩어진 동포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어줄 상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근대적 국민국가의 틀이 무너진 상황에서 혈통과 신화, 역사적 기억은 민족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연결고리였다. 그는 망명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정체성을 지키고 독립의식을 고취할 방법을 고민했고, 그 답을 단군이라는 민족의 근본적인 기원에서 찾았다.
이는 근대적 국민국가 형성과는 다른 방식의 민족 통합론이었다. 어찌 보면 서양의 시민 개념이나 법적·제도적 통합이 아닌, 원초적 민족주의로의 회귀였다. 신규식은 5천 년 역사의 문헌이 당대 이세적李世勣의 사고 소각, 원대 고려사 훼손 등으로 화를 입고 『단군사檀君史』, 『단조사檀朝史』 같은 고서들이 망실한 초라한 현실을 한탄했다. 그러면서 “우리 해군의 위인을 말하려면 일본사를 인용해야 하고, 우리 철갑선을 언급하려면 영국인의 기록을 보아야 하며, 우리 글의 간편함을 말하려 해도 미국 선교사들의 말을 빌어야 한다”며 문헌 상실의 비극을 개탄했다.
역사의 상실은 곧 민족 정체성의 상실과 마찬가지였다. 그가 보기에 워싱턴이나 넬슨 같은 외국 위인만 언급하고 한국의 선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현실이야말로 망국의 증거였다. 그러므로 역사를 복원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는 것은 단순한 학술적 작업이 아니라, 독립운동의 출발점이자 민족 부활의 필요조건이었다.
동제사에서 강연한 내용을 묶어 1920년 10월 『진단震壇』에 장편 사론으로 매주 연재된 『한국혼』은 국가 간 경계를 넘는 외교적 수단으로도 기능했다. 1939년 충칭에서 간행한 『한국혼』 5천 부 중 3천여 부가 중국 각계 인사들에게 배포되었다. 1940년 『신한민보』와 한국국민당 기관지 『한민』에 재연재되었고, 1942년 민필호가 편저한 『한중외교사화韓中外交史話』의 일부로 수록, 출간되었다. 1955년 대만 증정본에는 출판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지원했다는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출판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한국혼』이 단순한 개인 저작이 아니라 한국 독립운동의 공식 문헌이자 한중 외교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의미한다.
『한국혼』은 한국 독립운동가뿐 아니라 외국의 지식인들에게도 반향을 일으켰다. 가오옌高岩은 중국 『중앙일보』에서 문천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 비견하며 ‘절망보다 더한 슬픔은 없으므로 한국인은 마땅히 광복의 의지를 굳건히 해야 한다’는 신규식의 메시지를 높이 평가했다. 후정즈胡政之는 ‘영혼 불멸의 결정체’라 하고, 베트남 독립운동가 판 보이 차우潘是漢는 ‘한국인 인심을 위대하게, 그리고 사실적으로 묘사한 책’이라고 표현했다. 줘차오쯔拙巢子는 ‘음이 극에 달하면 양이 되듯 『한국혼』은 음을 양으로 이끌어낼 책’이라고 평가하며 신규식을 추모했다. 『한국혼』이 동아시아 지식인들에게도 감동을 준 것은 신규식의 민족주의가 배타적인 국수주의가 아니라,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피압박 민족들의 보편적 감정과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방 후에도 『한국혼』은 계속 새로운 판본으로 출간되었다. 1955년 예관신규식선생기념회에서 재간행할 때 이승만은 서문에서 신규식에 대해 ‘곤궁을 무릅쓰고 나라를 위해 전력을 다하고 절대 파당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충애심만을 지니고 있었다’라고 추모했다. 윤보선은 ‘한국인 중에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탐욕스럽게 쟁탈하려는 자, 동족을 생각하지 않고 증오하고 다투는 자는 마땅히 『한국혼』을 읽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1958년 『조선일보』는 ‘응건한 문장과 예리한 관찰로 우리 민족의 기맥을 그려낸 한국혁명사상의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했다. 이처럼 『한국혼』은 해방 후에도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텍스트로 지속적으로 소환되었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혼」, 『한민』 제1기 제2호
국망을 맞이해 해외로 흩어진 한국인들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끈은 무엇이었을까. 근대적 국민국가의 틀이 무너진 상황에서 신규식이 찾은 답은 단군으로 상징되는 공동의 뿌리였다. 혈통과 역사, 문화적 기억이야말로 민족을 하나로 모으고 회복할 힘이라고 여겼다. 따라서 『한국혼』의 메시지는 간단하고 명확하다.
“나라는 망했지만 우리 마음속의 대한, 즉 한국혼이 살아있다면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물리적인 국토를 빼앗겼지만 정신만은 지킬 수 있고, 그 정신이 살아있는 한 독립이 가능하다는 메시지였다. 신규식은 우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선조들의 업적을 되새기며 민족의 정체성을 되찾으라고, 그것이야말로 망국의 치욕을 씻고 다시 일어서는 길이라고 역설했다.
결국 『한국혼』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서 역사의 역할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신규식에게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을 넘어섰다. 그것은 망국민을 엮는 강력한 끈이었고, 독립의 희망을 품게 하는 원동력이었으며, 민족의 정체성을 되새기는 거울이었다. 신규식은 이처럼 역사를 통해 민족정신을 되살렸고, 그 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탱하는 동력 중 하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