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일제의 역사 왜곡과
조선사 편찬
— 글. 류시현(광주교육대학교 교수)
일본은 비서구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제국주의 국가가 된 나라였다. 일반적으로 제국주의는 식민지를 통치하기 위해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관계에 문명과 야만의 논리를 적용했다. 하지만 일제는, 다른 서구의 제국주의 국가와는 달리, 일본인보다 문화적, 역사적으로 앞섰다고 생각한 조선인을 지배해야 한다는 커다란 난관에 봉착했다. 그래서 일제는 강점 초기부터 식민 지배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한국의 역사를 왜곡했다. 이를 식민사학植民史學이라고 한다. 이러한 시도는 중추원의 『반도사半島史』 편찬 계획을 거쳐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간행으로 이어졌다.
©독립기념관
조선사편수회 고문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기 위해 우선 과거와 현재의 조선 사회를 조사했다. 조선인의 민속, 역사에 관한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조선의 옛 풍습을 조사한 구관제도조사舊慣制度調査가 이에 해당한다. 역사와 관련해서 일제는 1911년 이후 조선총독부 참사관실 주도로 ‘반도사’ 편찬을 추진했고, 1915년 참사관실의 업무가 중추원으로 이관됨에 따라 이 계획도 본격화되었다. 왜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하려 했을까? 이는 일제가 1916년에 발표한 〈『조선반도사』 편성의 요지〉에 잘 나타난다.
근대 조선에 있어서 일청日淸, 일러日露의 세력 경쟁을 서술하여 조선의 향배를 말하거나 혹은 『한국통사韓国痛史』라 칭하는 재외 조선인의 저서와 같이 일의 진상을 연구하지 않은 채 함부로 망설을 풀고 있다. 이러한 사적史籍의 인심을 유혹하는 해독이 진실로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들을 절멸絶滅시키려 해도 소용이 없고 노력을 많이 해도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악서惡書를 널리 전파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일제는 박은식의 『한국통사』를 ‘악서’ 즉 ‘나쁜 책’이라고 보았다. 박은식의 저서에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박은식은 혼魂과 백魄을 구분하고, 민족혼이 살아 있으면 민족공동체가 지속 혹은 부활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특히 ‘애통한 역사’란 의미를 지닌 『한국통사』는 일제의 침략 과정을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그리고 이 책은 국외는 물론 국내에까지 몰래 반입되어 민족혼을 일깨움으로써 항일의식을 고취했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의 역사를 자신들의 의도에 맞춰 재정리해야만 했다.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사학에 대항할 목적 아래 한국 고대사부터 조선 최근세사까지를 정리한 『반도사』를 편찬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중추원 소속의 한국인을 동원했지만, 집필진은 일본인이 중심이었다. 결국 다수의 조선인은 일제의 지시에 따라 자료를 수집하는 역할만 담당했을 뿐 실제 『반도사』의 서술은 일본인이 독점한 것이다. 1924년에 이르기까지 1편(상고 삼한), 2편(삼국), 3편(통일 후의 신라), 5편(조선)은 초고를 완성하였으나, 4편(고려)과 6편(조선최근세사)은 진행하지 못했다.
1919년 3·1운동 이후 한국인의 저항이 커지자,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사』 편찬의 필요성이 재차 제기되었다. 그 결과 『반도사』 편찬사업은 1924년 말 조선사편수회의 『조선사』 편찬사업에 흡수되었다. 조선사편수회의 조직상 위원회의 역할이 중요한데, 일부 한국인이 위원으로 참여했지만 실제로는 도쿄제국대학 교수 등 소수의 일본인이 모든 한국사 관련 편찬 업무를 장악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이전과는 달리 새로운 『조선사』 편찬체제를 갖추어야 했다. 이들은 10년이란 긴 기간에 걸쳐 『조선사』 편찬을 계획했다. 이에 따르면 처음의 3년은 사료 수집, 다음의 5년은 사료수집과 편집·기고, 마지막 2년은 초고 정리에 할당했다. 하지만 1924년까지 민간 소재 사료의 수집은 그리 활발하지 못했다. 한국인은 조선사편수회 설치를 우려의 눈초리로 바라봤다.
1920년대 당시 일제는 단군 성지聖地를 철폐하고 남산에 조선신궁을 설립하는 등 한국인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고자 했다. 특히 식민사학을 선전하는데 앞장섰던 일본 사학자들이 『조선사』 편찬업무를 주도했다. 조선사편수회가 『조선사』의 편찬을 시도하면서, 그들은 사료 중심의 『조선사』가 ‘학술적이고 공명적확한 역사책’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하지만 식민지 조선 언론은 우려감을 피력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는 사설을 통해 일제 주도의 역사 편찬을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1925년 10월 21~22일 자 「아사인수我史人修의 애哀」라는 사설을 통해 우리 역사를 일제가 편찬하게 된 슬픔을 밝혔다. 이러한 역사가 편찬되면 조선인의 ‘정신적 파산’이 될 것이라고 애통하게 여겼다. 『조선일보』 1926년 8월 8일 자에서는 조선사편수회 편 『조선사』에 단군이 수록되지 않거나 소홀하게 다루어진 점을 비판하고, 한국사에 관한 공정한 편찬을 촉구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아사인수의 애」, 『동아일보』(1925. 1. 21.)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사는 7시대로 구분」, 『동아일보』(1925.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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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
조선사편수회는 1932년 3월부터 1938년 3월까지 꼬박 6년간 36권의 『조선사』를 간행했다. 이후 1940년에 총색인 1권이 추가 간행됨으로써 『조선사』는 총 37권이 발간되었다. 1938년 『조선사』의 간행이 끝나자 편수회는 『조선사』 편찬의 후속 사업으로 갑오경장에서 경술국치에 이르는 기간의 자료수집에 착수해 이를 일제 패망 때까지 계속했다. 이후 조선사편수회 활동은 중일전쟁, 아시아-태평양전쟁 등으로 인해 자료 수집과 같이 장기간을 요하는 사업보다는 전쟁 수행에 ‘기여’할 수 있는 연구를 수행했다.
『반도사』 간행 계획 및 『조선사』 발간에서 나타난 일제의 ‘식민사학’의 특징은 우선 단군조선은 역사적 사실이 아닌 전설에 불과한 것으로 취급한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즉 단군신화를 우리 민족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본 것이다. 또한 위만조선의 위만衛滿은 중국 연나라로부터 이주해온 인물로, 위만조선은 중국 한漢민족이 세운 국가라고 했다. 반면에 한국사의 본격적인 역사시대는 한사군漢四郡의 설치부터 시작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당시 한사군의 영역 및 문화를 한국사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세히 기술했다.
한편 한반도의 남(신라, 백제, 가야)과 북(고구려, 부여)을 구별했다. ‘식민사학’은 우리 민족 고유의 개국 신화는 신라와 가락국의 것뿐이며, 이는 일본 민족의 개국 ‘신화’와 흡사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부여와 고구려의 예맥족濊貊族은 모두 ‘만주족’이라고 해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三韓만의 한종韓種과 구분했다. 이는 조선의 역사를 반도의 역사로 국한하려는 의도였다. 나아가 삼한과 여기서 확장된 백제, 신라, 가야의 경우 모두 일본의 ‘보호’ 아래 민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 식민사학자들의 고대사 서술의 주요 골자였다.
나아가 식민사학자들은 고구려가 한반도 전체를 통일하지 못한 것은 일본이 백제, 신라, 가야를 ‘보호’한 덕분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삼한은 일본의 강력한 지원 아래 유지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일본 진구황후神功皇后 시기의 가야는 일본의 ‘보호’ 아래 있었다고 주장한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그것이다. 또한 신라 역시 일본의 ‘부용국附庸國’으로 일본의 힘을 빌려 고구려의 침략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일제 식민사학의 특징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도 적용되었다. 고려시대는 고려 후기 몽골의 침략 이후 시기를 ‘원복속시대’라고 강조했다. 오늘날에는 고려시대의 특징을 송나라는 물론 아라비아 상인까지 찾아온 “활발한 대외관계”에서 찾는다. 반면 일제의 식민사학에서는 원나라의 ‘간섭기’가 강조되었다. 자율성의 반대인 ‘타율성’을 부각한 것이다.
식민사학은 조선시대에 관해 ‘외란外亂시대’라고 해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강조했다. 이 기간 속에 이루어진 의병義兵 등 국난 극복을 위한 한국인의 주체적인 저항활동의 내용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또한 조선 후기에 관해서는 이른바 당쟁黨爭과 외척의 ‘발호’ 등 부정적인 부분만으로 구성되었다. 당쟁과 이로 대변되는 역사 인식을 강조하는 식민사학을 ‘당파성론’이라고 부른다. 이와 달리 오늘날 한국 학계에서는 정치의 경우 여러 정파의 다른 의견을 조정하는 과정이라고 할 때, 조선시대의 정치를 ‘붕당朋黨정치’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듯 한국 고대사와 마찬가지로 고려와 조선시대의 전개 과정을 식민사학은 한국인의 내적 발전역량에서 구한 것이 아니었다.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매시기마다 외세에 의한 지배를 강조함으로써 한민족은 스스로 독립할 능력이 없는 민족인 것처럼 호도했다.
한국사의 ‘타율성他律性’을 부각하려는 의도가 한국사 전시기에 걸쳐 일관되게 표현되었다. 이렇듯 외세에 의한 ‘복속’의 역사는 당대사當代史 인식과도 연결되었다. 일제의 식민사학은 한말~일제 강점 초의 시기를 ‘일본 보호정치시대’, ‘일한병합’, ‘문명적 시설의 유입’ 등으로 서술했다. 일제의 식민지화 과정을 중국과 러시아에 대응해 일제가 ‘보호’했던 시기이며 이것이 강제 병합으로 이어졌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일제의 1910~20년대의 정치를 이른바 ‘문명’이 본격적으로 식민지 조선에 전해진 것으로 선전하고자 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조선총독부의 주도 아래 이루어진 ‘식민사학’은 한국 민족과 일본 민족이 동일한 종족임을 주장하는 ‘일선동조론’을 강조함으로써 식민통치의 역사적 ‘당위’를 찾고자 했다. 과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거짓 주장을 바탕으로 20세기 전반기 일본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나아가 고구려의 침략에 대항한 일본의 한韓 종족 보호라는 ‘시혜론施惠論’이 강조되었다.
또한 한국인이 자체적으로 ‘문명화’의 가능성이 없었다고 서술하면서 강제 병합으로 인해 비로소 문명화가 되었음을 증명하고자 했다. 편찬되지 못한 『조선반도사』와 37권으로 간행된 조선사편수회편 『조선사』는 이러한 총독부의 편찬 취지를 충실히 수행한 관찬官撰 역사책이었다. 이에 참가한 일본인 학자들은 일제강점기 식민사학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연구를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