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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자료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배지

임시정부의 자료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배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중국 충칭重慶에서 결성한 항일 무장 조직이었다.

─ 글. 이홍구(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학예연구사)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배지 앞뒷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배지 앞뒷면

광복군 배지류

©독립기념관

광복군 배지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자료수집 담당을 맡고 있던 2023년 6월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배지를 가지고 있는데, 한 번 봐주시겠어요?” 아직 그 실체가 알려지지 않은 배지 실물을 보기 위해 바로 만나자고 하였다. 소장자는 흔쾌히 보여주겠노라며, 기념관으로 배지를 가지고 왔다.

배지에는 무엇이 담겨 있나

원형으로 된 배지에는 바깥쪽에 파란색으로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라는 한자와 함께 ‘한국’과 숫자 ‘100’이 새겨져 있다. 가운데에는 태극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건곤감리가 태극을 감싸고 있다. 뒷면에는 옷핀이 달려 있을법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한 배지는 지금까지 다섯 가지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배지이고, 나머지 네 종류는 한국광복군에서 사용하던 배지 3종과 모표다. 그런데 이번에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배지가 발견되면서 그 수가 하나 더 늘어난 것이다.
일단 크기를 비교하자면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배지의 지름은 29.4mm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배지와 한국광복군 배지류의 지름은 23~24mm로서 약 5mm 정도 더 크다.
뒷면을 살펴보면, 모두 옷핀 형태로 군복에 착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배지에는 별도의 각인이 없다. 이에 비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배지는 상단 테두리에 ‘大韓民國臨時政府’, 하단 테두리에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각인한 해와 함께 일련번호로 추정되는 숫자가 기록되어 있다.

배지를 어디에 달았을까

현재 대한민국 육·해·공군의 부대 마크는 직물류 형태로 왼팔 어깨 부분에 부착한다. 하지만 한국광복군을 비롯한 당시 군복을 착용한 사진을 보면 배지 형태로 왼쪽 가슴에 붙이고 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사진은 두 장 정도가 남아 있다. 두 사진에 보이는 배지 착용 위치를 보면 앞에서 언급한 다른 배지와 같이 왼쪽 가슴 주머니 위에 부착하고 있다.
이렇게 왼쪽 가슴 부분에 배지를 달았던 데에는 중국 국민정부 군복 복제服制의 영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광복군 등 임시정부 계열 복식을 주로 연구한 김정민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광복군의 복식 구성의 대강을 중국 국민정부의 군복 제도를 정립한 「육군복제조례陸軍服制條例」와의 유사성에서 찾고 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복식 역시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의 복식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중국 국민정부 군대의 복식을 따랐을 것이고, 배지의 착용 위치도 같게 적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1939. 4. 4.)

©독립기념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어떤 활동을 했을까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39년 11월 중국 충칭重慶에서 결성한 항일 무장 조직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중국 관내에서는 다양한 한인 무장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중국 국민정부와의 연대를 통해 일본군과 직접 전투를 치를 목적이었다. 1938년 11월 우한武漢에서 조선민족혁명당 계열의 조선의용대가 만들어졌고, 1939년 2월 류저우柳州에서 한국국민당과 (재건)한국독립당 등 광복진선 계열의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가 결성되었다. 그리고 충칭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공작대의 구성원은 크게 두 부류였다. 나월환과 이하유, 박기성 등 충칭에 모여든 아나키즘 계열과 김인, 조시제, 김동수, 김원영 등 류저우 광복진선청년공작대 출신 세력이 그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1930년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등 중국 군사학교에서 훈련받은 경험이 있었다. 나월환이 공작대장을 맡았고, 김동수가 부대장을 맡았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창설 결성 직후인 1939년 12월 시안으로 이동하였다. 이곳에서 후중난胡宗南이 이끄는 중국군 제34집단군과 연계하여 활동하면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거나 초모공작,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일본군 점령지역에 있던 한인들을 모집하여 중국 제34집단군 내에 개설된 한국청년훈련반(한청반)에 배속시켰다. 이들은 군사훈련을 받고 공작대원으로 편입되었다. 또한 『한국청년』이란 기관지를 중국어로 발간하고, 여러 연극 공연을 통해 중국인들과의 연대를 위해 힘을 쏟았다. 대표적인 공연이 한유한이 제작했던 ‘아리랑’이었다.
시안에서 중국과의 항일 연대 활동을 꾸준히 벌였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1941년 1월 1일 신년 단배식이 끝난 후 한국광복군 제5지대 편입을 선언하면서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합류 이후에도 공작대 시절 조직 체계가 그대로 운영되면서 초모, 선전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하였다.

조선의용대 성립 1주년 사진(1939. 10. 10.)

©독립기념관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시안으로 떠나기 전 사진
(1939. 11. 17.)

©독립기념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성립 1주년 사진(1940. 11. 11.)

©독립기념관

광복군 제5지대 성립 기념사진(1941. 1. 1.)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