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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해방 후 한국광복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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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한국광복군

— 글. 김용달(前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김구 삼부자(왼쪽이 김인, 오른쪽이 김신)(1940년대)


©개인 소장

김국주 사단장이 2군 의장대를 사열하는 모습(1960~70년)

환국한 한국광복군의 사명

한국광복군(이하 광복군)은 민주공화제로 성립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국군이었다. 그래서 광복군은 근대 민족의식과 시민의식을 견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병·독립군으로 내려온 민족군사의 대통을 잇는다는 투철한 역사의식을 가졌다.
더욱이 ‘한국광복군 총사령 이청천’은 환국을 앞두고, 1946년 5월 16일 「한국광복군복원선언韓國光復軍復員宣言」을 발표하여 귀국하는 광복군 대원들에게 역사적 사명을 부여하였다.

본군(광복군)은 3천여 년의 줄기찬 항적抗敵 복국정신을 받들고, 국내외 무장혁명의 대통을 계승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전 대원이 귀국하여 조국건설 대업에 참가할 것을 명한다. …본군 복원 대원들은 모두 정성과 노력을 다하여 안으로 민주 단결을 실현하고, 밖으로 독립 평화를 달성하도록 한다.

귀국하는 광복군 대원들에게 조국건설 대업에 참여하여 민주 단결과 독립 평화를 달성하도록 명령한 것이다. 광복군 출신들이 해방 이후 국군에 참여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광복군 출신들은 미군정기 창군 과정만이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대거 국군에 투신하였다. 그리하여 광복군 출신들은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과 국군의 정체성을 확립하였고, 나아가 6·25전쟁에 참여하여 조국을 수호하는 데도 크게 공헌한 것이다.

한국광복군의 창군 과정 참여

광복군 출신들은 임시정부 국군인 광복군이 해방된 조국의 국군 창설의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래서 미 군정청이 주도하는 군대 창설이나 군사기관에 참여하는 것을 마땅치 않게 여겼다. 더욱이 미 군정청의 ‘현상유지 정책’으로 식민체제가 그대로 유지되고, 일본군과 만주군 출신 등 친일 경력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던 상황도 광복군 출신들이 미 군정시기 창군 작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은 이유였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다. 미국의 반대로 임시정부의 국군이 아니라 개인 자격으로 환국하였고, 그것조차 배편 등 여러 사정으로 1946년 5월 이후에야 귀국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1945년 12월 개설한 군사영어학교가 운영되다가 해체되고, 1946년 5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가 개교하여 제1기 생도를 모집한 뒤였다.
이런 상황에서 광복군 출신들이 미 군정청의 창군 작업에 참여하는 계기가 생겼다. 1946년 9월 2일 광복군 참모총장 출신 유동열이 통위부장(국방부장)에 취임하고, 12월 23일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 참모 출신 송호성이 조선경비대사령관에 부임하게 되었다. 이에 광복군 출신들이 조선경비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1946년 9월 23일 선발한 제2기부터다.
조선경비사관학교에는 제2기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7월 임관한 제6기까지 적지 않은 광복군 출신들이 입교하여 창군 작업에 동참하였다. 이들을 기수별로 살펴보면, 제2기에는 송호성을 비롯하여 고시복·이명(이의명)·박영일·이무중·최용덕 등 6명이, 1947년 1월 선발한 제3기에는 박기성·박승헌·박시창·전이호·채원개·최덕신·최봉진·한성도 등 8명이 입교하였다.
1947년 4월 선발한 제4기에는 강흥모·이건국 등 2명, 같은 해 10월 선발한 제5기에는 김소·김용관·문응국·박영준·박용운·박재곤·박종길·유영중·장철부·차약도·최규련·최세득·김명탁 등 13명이 입교하였다. 이밖에 1945년 12월 개설된 군사영어학교에 광복군총사령 전속부관 출신 유해준과 중국군 장교로 있다가 광복 후 광복군 베이징잠편지대 참모를 역임한 이성가가 입교하였다.
그리하여 미 군정시기 창군 과정에는 통위부장 유동열, 조선경비대사령관 송호성을 비롯한 조선경비사관학교 출신 29명, 유해준과 이성가 등 군사영어학교 출신 2명 등 모두 32명의 광복군 출신이 참여한 것으로 확인된다.

한국광복군의 대한민국 국군 참여

1948년 7월 17일 제헌헌법과 더불어 공포된 정부조직법에 의해 국방부가 설치되었다. 이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공포한 다음 날인 8월 16일 국방부는 훈령 제1호를 발포하여 “금일부터 아 육해군 각급 장병은 대한민국의 국방군으로 편성되는 영예를 획득하게 되었다.”고 선언하였다. 이로써 미 군정청에서 추진해오던 창군작업과 그 군대가 국군으로 편성되었고, 국군이 공식적으로 창설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 군정청은 행정권을 이양하였다. 군사권 이양도 1948년 8월 24일 대한민국과 미국 간에 체결된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협정’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미 군정청 통위부장 유동열은 대한민국 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 이범석에게 군사권을 이양하였다.
미 군정청 조선경비대도 1948년 9월 1일 국군으로 개편되었다. 9월 5일 조선경비대는 육군으로, 조선해안경비대는 해군으로 편성된 것이다. 조선경비대가 육군으로 개편되면서 조선경비사관학교도 육군사관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이로써 대한민국 국군의 창설 과업은 완료되었고, 대한민국 군대는 ‘국군’이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광복군 출신들은 대거 국군에 투신하였다. 임시정부 국군으로 활동한 광복군 출신들은 자신들이 대한민국 국군의 주축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특히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과 제2지대장을 역임한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관, 광복군총사령부 총무처장을 지낸 최용덕이 국방부 차관에 임명되자 광복군 출신의 국군 참여는 크게 늘어났다.
육군사관학교 입교에도 이런 양상이 뚜렷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인 8월 17일 선발한 육군사관학교 제7기에는 김국주·김관오·김명천·박영섭·박영진·윤태현·이신성·장철·태윤기·황영식·황의선·이진영 등 12명의 광복군 출신들이 입교하였다. 이들 가운데 황영식을 제외한 11명은 특별반으로 입교한 뒤, 군사경력에 따라 특별 임관 형식으로 국군 간부가 되었다.
1948년 9월 5일 조선경비사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로 개편된 뒤 12월에 모집한 제8기에는 더 많은 광복군 출신들이 입교하였다. 임시정부 내무부 경위대장 및 한커우잠편지대장을 역임한 권준을 비롯하여 구자민·김병학·김영오·김영일·노복선·승영호·안춘생·이금렬·이준식·이홍근·장호강·전재덕·함세만·김동수·오광선·장흥·나태섭 등 18명의 광복군 출신들이 입교한 것이다. 이들 가운데 권준·구자민·김영오·김영일·노복선·안춘생·이준식·장호강·김동수·오광선·장흥·나태섭 등 12명은 특별반 형식으로 입교하였는데, 이들 또한 특별 임관 형식으로 국군 간부가 되었다.
이밖에 임관경로를 알 수 없으나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6·25전쟁 시기까지 국군에 투신한 광복군 출신은 40여 명으로 파악된다. 육군 장교로 투신한 이들이 김영관을 비롯하여 30여 명에 달하고, 해군에 투신한 이는 독립운동가 민제호의 아들로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 참모 출신인 민영구 등이 있고, 공군으로는 임시정부 주석 김구의 아들인 김신 등 3명이 참여한 것이다.


©개인 소장

육군대학 앨범(1956)

국군에서 한국광복군의 역할과 의의

광복군 출신자들은 국군에서 어떠한 역할을 했을까. 초대 국방부 장관 이범석은 국군이 법적인 지위와 조직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국방조직을 정비하였다. 초대 국방부 차관 최용덕은 국군에서 공군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법제화하는 데 공헌한 점이 주목된다.
광복군 출신들은 군사교육기관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각 군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에서 군사간부 양성은 물론 보병학교·군의학교·훈련소 등에서 정병 육성과 국군의 민족 정통성을 고양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광복군 출신들은 초창기 군사간부 육성기관인 사관학교에서 교장을 주로 맡았다. 조선경비사관학교가 육군사관학교로 개편되면서 광복군 출신들이 교장을 연이어 맡은 것이다. 광복군 총사령부 선전과장으로 활동한 최덕신이 6대,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한 김홍일이 7대,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 참모 출신 이준식이 8대, 광복군 제2지대 제1구대장과 난징잠편지대장을 역임한 안춘생이 9대 교장으로 활약하며 국군 간부 육성에 헌신하였다.
공군사관학교와 해군사관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초대 국방부 차관을 역임한 최용덕은 1950년 5월 제3대 공군사관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여 공군 간부 육성에 힘썼다. 해군 창설에는 독립운동가 민제호의 아들이자 임시정부 외무차장 민필호의 조카로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출신인 민영구, 그리고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의 아들인 손원일의 역할이 컸다. 손원일은 초대 해군참모총장으로 해군사관학교 교장을 겸임하면서, 민영구는 1959년 4월 제9대 교장에 부임하여 해군 간부 육성에 힘쓴 것이다.
광복군 출신들은 6·25전쟁에도 참전하여 분전하였다. 광복군 출신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인물은 1백여 명으로 파악된다. 계급별로는 장교 97명, 부사관 2명, 기타 1명이다. 군별로는 육군 96명, 해군 1명, 공군 3명이다. 이 가운데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붕준의 사위이자 여자 광복군 김효숙·김정숙 자매의 남편인 송면수와 고시복 등 18명이 전사하고 3명이 사망하였으며, 1명이 실종되고 1명이 납북되었다.
6·25전쟁에 참전한 광복군 출신의 활약상도 주목된다. 서울함락 직후 김홍일은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후퇴하는 국군을 수합하여 한강 방어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긴박한 상황에서도 중국군에서 익힌 전투경험을 살려 북한군의 한강 도하작전을 일주일 동안 막아냈던 것이다. 이 같은 지연 작전으로 UN군이 참전할 수 있는 시간도 벌 수 있었다.
이성가는 제8사단장으로 북한군에 맞서 강릉과 영천전투에서 용전하였고, 김은석은 낙동강 방어전투에서 활약하였다. UN군의 인천 상륙작전 성공 이후 국군의 북진 과정에서 백창섭은 평양 탈환전투에 참가하고, 박시창은 흥남 철수작전 당시에 제1군단 예민참모로 피난민 이송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렇지만 6·25전쟁 과정에서 이건국은 북한군의 남하작전에 맞서 횡성전투, 김영남은 안동전투, 황하규는 영덕전투에서 전사하였고, 윤태현은 충북 단양에서 북한군에 맞서 싸우다 무단 철수하여 즉결 처분되기도 하였다. 중공군 개입 이후 후퇴 과정에서 김일환은 평남 덕천전투에서 전사하는 등 희생자도 적지 않았다.
이와 같이 광복군 출신들은 국군 창설과 정병 육성은 물론, 6·25전쟁에 참전하여 조국을 수호하는 데 앞장섰다. 민족독립과 조국광복을 위해 싸웠던 광복군의 독립정신이 광복 후 국가수호의 호국정신으로 발현된 것이다.


©독립기념관

김홍일 공로패(1950년대)

이범석 회고록 『우둥불』(1971)

이범석 회고록 『한국의 분노』(19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