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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광복군 창설과 초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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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광복군 창설과 초기 운영

— 글. 류동연(국가보훈부 학예연구관)


©독립기념관

광저우 황포군관학교의 현재 모습

한국광복군 창설 배경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의 국군이다. 한국광복군의 창설 배경으로는 먼저 임시정부의 지속적인 군대 편성 노력을 꼽을 수 있다.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성립된 임시정부는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다. 1919년 11월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임시관제」를 발표하여 군무부의 조직과 직무를 명문화했고, 12월 군무부령 제1호로 「대한민국육군임시관제」를 통해 육군 창설을 구체화했다. 임시정부는 군단을 구성한다는 목표로 1만 3천에서 3만여 명 수준의 군대편성을 계획했고, 만주지역의 수많은 독립군 단체를 임시정부 산하로 통할하고자 했다.
비록 임시정부의 군사 계획이 실현되지 못했으나,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했던 임시정부의 정책은 변함이 없었다. 1930년대 들어와 만주사변의 발발(1931), 이봉창·윤봉길의거(1932), 중일전쟁의 발발(1937)로 인해 중국 관내지역 한국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띠었다. 특히 중일전쟁을 계기로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군사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처럼 임시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이 한국광복군의 창설로 이어졌던 것이다.
한국광복군 창설의 또 다른 배경으로 1910년대부터 중국의 군관학교를 통해 군사간부가 지속적으로 양성되었다는 점과 중국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세력이 1930년대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한 점을 들 수 있다. 1910년대에는 운남강무당과 귀주강무당 등에서 한인청년들이 군사훈련을 받았다. 1920년대에는 임시정부와 한인노병회를 비롯하여 중국육군군관학교(통칭 황포군관학교)에서 한인들이 훈련받았으며, 1930년대에는 중국 측의 지원을 받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낙양군관학교 등에서 군사간부가 양성되었다. 이렇게 군사간부로 양성된 한인들은 중국군이나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했으며, 훗날 한국광복군의 주요 성원이 되었다. 또한 1930년대 중국 만주에서 관내지역으로 이동한 무장 독립군 세력은 한국광복군 창설 과정부터 참여하여 광복군의 조직과 운영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끝으로 1930년대 후반 중국 관내지역에서 창설된 조선의용대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와 같은 한인무장부대도 한국광복군 창설의 배경이 된다. 한국광복군의 연구에 따르면 중국 관내지역의 좌익 무장부대인 조선의용대와 무정부주의 계열 청년을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한국광복군 창설에 자극이 되었다고 분석한다. 당시 중국 관내지역 한인무장세력들은 서로 경쟁하는 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이는 한국광복군의 창설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위 두 무장 세력은 훗날 한국광복군으로 통합된다.


©독립기념관

안춘생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졸업증(1936)

한국광복군 창설의 경과

1937년 7월 중일전쟁의 발발을 계기로 임시정부는 본격적으로 군사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37년 7월 15일 임시정부는 만주지역에서 독립군을 조직하여 활동한 경험이 있던 유동열, 이청천, 김학규 등을 중심으로 군사위원회를 발족시키고, 군사정책과 활동을 담당시켰다. 또한 1939년 11월 국무회의에서 군사양성과 독립전쟁 수행에 관한 핵심 계획을 담은 「독립운동방략」을 결정했다. 이러한 계획에 따라 본격적으로 한국광복군 창설이 추진되었다.
군대를 조직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병력과 무기, 그리고 재정의 확보가 필요했다. 이는 한국광복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중국지역에서 임시정부 군대, 즉 중국 입장에서 ‘외국’ 군대를 조직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중국 국민정부의 지지가 필요했다. 따라서 한국광복군 창설은 크게 병력 모집, 재정 확보 그리고 중국 국민정부의 양해와 승인을 얻고자 하는 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독립기념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 개회를 선포하는 김구와 옆에 선 김학규(1940. 9. 17.)

첫 번째 병력의 모집은 군사특파단을 통해 진행되었다. 임시정부는 조성환을 책임자로 하여 군사특파단을 조직한 후 중국 시안西安으로 파견하여 병력을 모집하고자 했다. 당시 시안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지역과 최전선을 이루는 곳이었다. 자료마다 차이가 있지만 화북지역에는 약 20만에 달하는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임시정부는 이와 같은 정세에 주목하여 화북지역의 한인들을 한국광복군의 병력으로 모집하고자 했던 것이었고, 군사특파단은 중국군 제2전구 사령관 옌시산閻錫山의 협조 아래 한인들을 모집했다. 한국광복군에 관한 한 연구는 군사특파단이 광복군 창설의 산파 역할을 맡았다고 평가한다.
둘째로 군대 운영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고자 했다. 특히 미주 동포들의 지원은 재정 확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실 미주 동포들의 재정적 지원은 임시정부를 지탱하는 힘이었다. 임시정부는 미주 지역에 광복군 창설 소식을 알리면서 재정적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대해 미주 동포들은 한국광복군 창설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적극적으로 모금 활동을 진행했다. 미주 동포들의 지원은 임시정부가 광복군 창설을 추진하는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끝으로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창설에 대해 중국 국민정부의 지지를 받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중국 내에서 군대를 조직하는 일에는 중국 당국의 승인과 양해가 필요했다. 그리고 미주 동포들의 지원만으로는 군대 운영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할 수 없었기에 중국 정부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얻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임시정부 측에서는 중국 당국의 주자화朱家華·쉬언정徐恩曾등에게 한국광복군 창설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중국군사위원회의 협조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40년 5월 임시정부는 한국광복군 편성 계획서인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을 제출하고 광복군 편성의 인준과 이에 대한 재정적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장제스蔣介石는 “한국광복군이 중국항전에 참가한다.”는 전제하에, 군사위원회에 협조를 지시했으나, 실무진들은 한국광복군이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임시정부는 이러한 주장에 대해 반대했다. 때문에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큰 진전을 보지 못했고, 결국 임시정부에서는 중국 측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이러한 방침에 따라 임시정부는 그동안 중국 관내지역에서 양성해 온 군사간부들과 만주 독립군 출신을 중심으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1940년 9월 15일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고, 17일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한다는 것을 대내외에 알렸다. 이 선언은 중국 국민정부 실무자들과의 협의 없이 발표되었는데, 임시정부가 독자적이고 자주권을 가진 광복군을 창설하겠다는 의지가 내포된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중국 충칭의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중국 국민정부의 인준 없이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고,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다.


©독립기념관

광복군 제2지대 사열사진

한국광복군 초기 조직과 변천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임시정부가 꾸준히 추진해온 군대 편성의 계획을 실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1940년 9월 17일 창설 당시 구성이 완료된 조직은 총사령부뿐이었다. 한국광복군은 인적 기반을 바탕으로 부대를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우선 동원이 가능한 인원으로 총사령부를 구성하고 이후 군대로서 조직을 발전시키고자 했다.
총사령부의 조직 체제는 1940년 10월 9일 공포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조직조례」에 따라 체계화되었다. 총사령부는 임시정부 주석의 직할하에 있었다. 그리고 광복군의 지휘 통솔을 관장하는 총사령(이청천)과 그를 보좌하는 참모장(이범석)을 중심으로 10개 처의 부서가 설치되었고, 특무대와 헌병대를 두었다.
총사령부는 창설 직후 시안으로 이전했다. 시안에는 이미 군사특파단이 활동하고 있었다. 또한 화북지역과 가까운 전선으로 이곳에 이주해 온 한인들을 대상으로 초모·선전활동을 하기에 적합한 곳이기도 했다. 임시정부는 제1기의 임무로 장병을 모집하여 훈련시키고 최소 3개 사단을 편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안에 총사령부가 설치되면서 한국광복군의 본격적인 군사활동이 시작되었다. 총사령부는 충칭에서 온 인원과 군사특파단인원을 중심으로 제1·2·3지대를 구성하고,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편입시켜 제5지대로 구성했다. 특히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한국광복군 합류 이전부터 시안을 거점으로 초모공작을 전개하여 많은 성과를 보았고, 이러한 성과가 한국광복군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의 합류에 따라 총사령부와 단위부대로 4개 지대를 갖추게 되었다.
제1지대는 군사특파단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대장은 이준식이 맡았다. 제2지대는 주로 총사령부 인원들로 구성되었고, 지대장은 공진원이었다. 하지만 제3지대는 지대원 없이 지대장 김학규 외에 다른 조직을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제5지대는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편입됨에 따라 구성되었으며, 지대장은 공작대를 이끌던 나월환이 맡았다.
이와 같은 체제는 1942년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어 대폭 개편되기 전까지 유지되었다. 1941년 말부터 중국 관내지역 좌파세력의 임시정부 참여가 논의되었다. 그 결과 1938년 10월 중국 우한武漢에서 창설되어 활동하고 있던 조선의용대가 1942년 5월 한국광복군에 합류하게 되었다.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됨에 따라 우선 총사령부에 부사령제가 신설되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는 한국광복군의 제1지대로 편성되었다. 제1지대는 충칭에 본부를 두었으며, 지대장은 조선의용대를 이끌던 김원봉이 맡았다. 김원봉은 총사령부의 부사령을 겸임했다. 제1지대는 지대본부와 2개의 구대區隊로 구성되었는데, 후베이성湖北省 라오허커우老河口와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에서 활동했다.
제2지대는 시안에 본부를 두었다. 제2지대는 기존의 제1·2·5지대가 통합되어 구성되었으며, 지대장은 총사령부 참모장이었던 이범석이 맡았다. 편성 당시 약 80여 명의 대원을 확보하였다. 총무조와 정훈조로 구성된 지대본부, 산하에 3개 구대를 편성했다.
제3지대는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 본부를 두었다. 김학규를 지대장으로 한 제3지대는 편제상으로 존재했으나, 1942년부터 안후이성 푸양을 중심으로 초모활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 일본군 내의 한적사병韓籍士兵들이 탈출해 온 경우도 많았다. 이들을 기반으로 1945년 6월 제3지대가 정식 발족되었다.
한국광복군은 창설 직후 운영 등의 어려움을 겪었고, 1941년 ‘9개 준승’에 따라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어 자주권을 잃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속적으로 자주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여 1944년 다시 자주권을 회복했다. 또한 연합국과도 공동작전을 추진하여 인도·버마 전선에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공작대를 파견하기도 했으며, 미국 OSS와 협의하여 국내진공작전을 위해 비밀 훈련을 진행하기도 했다.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임시정부의 지속적인 군사정책의 결실이었다. 또한 미주 동포를 비롯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헌신과 희생 위에서 창설·운영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광복군은 스스로가 밝혔듯이 대한제국 군대를 계승했으며, 만주독립군 출신들이 대거 참여하여 독립군의 인적 맥락을 이어받았고, 해방 후 광복군 출신들이 대한민국 군대에 참여했다. 따라서 한국광복군은 [대한제국군-만주독립군-한국광복군-대한민국 국군]으로 연결되는 한민족의 군사 정통을 이어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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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군 제2지대 대원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