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광복군의 활동
— 글. 김광재(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1940년 9월 17일 한국광복군은 중국의 전시수도인 충칭重慶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었다. 중국 영토에서 활동해야 하는 제약하에서도 광복군은 병력을 모집하고 적극적인 선전활동을 통해 국제적 여론을 끌어내고 국내외 동포들에게는 광복군의 활동과 한국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알렸다.
국제적으로도 연합군의 대일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광복군은 인도·버마 전선에 공작대를 파견하여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을 수행하였다. 또한 미국 전략첩보국OSS과 합작하여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하는 한미 공동작전을 전개하였다.
구보 중인 광복군 대원들
훈련 중인 광복군 대원들
광복군은 당초 총사령부만으로 창설되었고, 창립 1개년 후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한다는 것을 당면전략으로 삼았다. 즉 우선 동원 가능한 인원으로 창군부터 하고 이후 병력을 확보하여 부대 규모를 확대 강화해 간다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광복군은 병력을 모집하는 초모공작을 활발히 수행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던 화북 지방에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해 있었다. 광복군은 이들을 대상으로 적지 않은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였다. 아울러 1944년 이후 학병으로 중국 전선에 끌려온 한인 청년 수십 명이 일본군을 탈출하여 광복군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와 같이 적극적인 병력 모집 활동 결과 창설 당시 수십 명에 불과하던 광복군은 1945년 8월 전후 약 7~800여 명의 병력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시안西安에서는 중국군 중앙전시간부훈련단에 한국청년훈련반을, 안후이성 린취안臨泉에서는 한국광복군훈련반이 설치되어 이들 모집된 청년들을 군사 초급간부로 양성하였다.
광복군은 선전활동을 중시하였다. 광복군의 창설 사실과 그 존재를 알리고 광복군이 국제적인 지위를 얻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선전활동이 대단히 중요하였다. 그래서 광복군은 선전활동을 주요한 당면공작의 하나로 설정하였다. 광복군은 선전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총사령부에 정훈처와 선전과를 설치하여 담당하게 하였다.
동포들을 상대로 한 선전방침은 주로 적 점령 지역 내에 있는 동포들에게 집중되었다. 이들을 대상으로 광복군에의 참여와 지원을 위해 선전공작을 전개하였다. 또 중국전선의 일본군 내 한적사병들도 선전활동의 대상이었다. 이와 함께 국제적 여론을 환기시키기 위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광복군이 국제적인 지위를 얻고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쟁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연합국의 국제적 여론과 동정을 유도하는 선전활동을 전개할 필요가 있었다.
아울러 충칭 방송국을 통해 광복군에 대한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였다. 즉 3·1절이나 광복군 창설 기념일, 기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기념선언문과 성명서를 발표하고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렸다. 그 밖에도 기관지 『광복』을 발행하여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당위성을 널리 알리기도 하였다.
광복군은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인도·버마 전선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영국군과 협동하여 대일전을 수행하였다. 일본군과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는 인원을 필요로 했던 인도 주둔 영국군의 요청을 받은 광복군은 1943년 8월 광복군 대원으로 구성된 인면전구공작대를 파견하였다.
인도 현지에 도착한 공작대 대원들은 영국 인도군총사령부에서 영어와 방송기술 교육을 받았다. 교육을 마친 대원들은 영국군에 분산 배치되었다. 일본군과 접전하고 있는 최전선에 투입된 공작대는 일본군에 대한 선무공작, 후방지역의 교란, 일본군 포로의 심문, 노획한 문서의 번역 등 전쟁 수행을 돕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인도·버마 전선에서 활동한 인면전구공작대원들
공작대는 1944년 초부터 영국군과 일본군이 대접전을 벌였던 임팔 전투에 투입되었다. 당시 연합군 측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된 이른바 버마공로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작전이 임팔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델리에서 훈련을 마친 공작대는 부야크에 집결한 뒤 임팔 전장으로 투입되었다. 이때 공작대는 대적 선전, 포로 심문, 적 문서 번역 등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공작대는 정확한 적 정보의 분석과 적의 무선전신을 통해 일본군의 작전계획을 사전에 알아내어 일본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해있던 영국군이 이를 벗어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기도 하였다. 영국 신문들은 이들의 활약상을 상세히 보도하면서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1945년에는 버마에서 일본군을 축출하는 버마 총반격전에 참여하였다. 공작대는 영국군 전투부대에 분산 배속되어 이 작전에 참여하여 인상적인 활동을 펼쳤다. 버마 최대의 격전지였던 만달레이 공방전에 합류한 것을 비롯해 버마의 수도 양곤 상륙작전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공작대의 활동은 일본군에게 심리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영국군의 포로가 된 일본군은 광복군이 인도·버마에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 함께 작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공작대 대원들의 활약이 양호한 성과를 거두게 되자, 영국군에서는 더 많은 인원의 파견을 임시정부 측에 요청해왔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는 영국군과 공식적인 협정의 체결과 인원의 증파를 추진하였다. 그러나 광복군을 지휘하던 중국군사위원회의 견제 등 복잡한 내외 정세로 인해 공작대 인원 증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는 1943년 8월 인도에 파견된 이래 1945년 7월 인도·버마 지역에서의 활동을 종료할 때까지 2년간에 걸쳐 대원 10명이 영국군과 함께 대일작전에 참여하였다. 공작대는 일제가 항복한 후 9월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공작대의 활동은 영국군이 대일작전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나아가 한국 독립운동의 공간을 확대하였다는 측면에서도 주목되는 것이었다.
한국광복군 제2지대 주둔지인 두곡양참
(중국 시안)
독수리작전 훈련 당시 태극기와 성조기를 들고 사열한 한국광복군 제2지대원들(1945. 7. 4.)
광복군은 인도·버마 전선에서 영국군과 합작하여 대일전에 참여한 데 이어 미군과도 합작을 추진하였다.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즉각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였으며 미국에 대해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할 뜻을 천명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는 미국 정부 혹은 주중 미군사령부에 대해 한인의 대일전 참여를 지속적으로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광복군은 태평양전선에서 일본군을 무찌르면서 북상하고 있는 미군과의 합작을 모색하였다. 1944년 9월 광복군은 충칭 주재 미국 OSS에 대일 심리전을 제안하였다. 미국으로서도 대일전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광복군 대원들을 대일작전에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1월 중국전선에 학병으로 끌려왔다가 탈출한 한인 청년들이 충칭의 임시정부로 찾아온 일은 광복군과 OSS의 합작을 급진전시켰다.
그 결과 1945년 광복군과 OSS의 합작은 ‘독수리작전’의 형태로 구체화되었다. 즉 광복군 대원들을 훈련시켜 서울 등 한반도의 전략거점에 투입하여 정보수집과 게릴라활동을 전개한다는 국내진입작전이었다. 이들은 국내 거점에서 각 지역의 일본군 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연합군의 상륙이 임박할 경우 지하운동을 조직하고 한국인의 봉기를 지원하기로 되었다.
국내진입작전을 위해 한미 양측은 시안 주둔 광복군 제2지대 본부에 훈련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훈련을 시작하였다. 합작훈련 제1기 훈련생으로는 한인 학병 출신들과 기존의 광복군 제2지대 대원들에서 50명의 적격자들이 선발되었다. 주된 훈련 내용은 이들이 한반도에 침투해서 적의 중요 군사시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시 이를 무전으로 중국에 타전하기 위한 첩보훈련과 통신 무전 훈련이었다. 그 밖에 일본에 대한 심리전 기술, 연합군의 공중 폭격이나 상륙작전을 전개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기상학 교육도 포함되었다. 훈련생들은 “특히 통신에 있어서 특출하다”는 OSS의 보고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 성적은 대체로 우수했다. 학과 교육을 마친 후에는 야전훈련이 실시되었다. 야전훈련 역시 일정한 단계에 따라 시험을 실시하였으며 이를 통과해야 다음 단계의 훈련에 들어가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8월 초 제1기 훈련생들이 약 3개월 과정의 엄격하고 강도 높은 훈련을 마치고 한반도 투입 명령을 기다리게 되었다.
8월 5일 김구, 이청천, 엄항섭 등 임시정부 및 광복군 수뇌부로 구성된 시찰단은 시안으로 날아가 광복군 훈련생들을 사열하고 격려하였다. 8월 7일 김구는 시안에 와 있던 워싱턴의 OSS 총책임자인 도노반과 한미공동작전을 위한 회담을 개최하였다. 한미 양측은 회담에서 한반도를 목표로 하는 공동작전의 조속한 실행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광복군이 추진하였던 국내 진입작전은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미처 실행되지 못하였다. 8월 9일 시안에서 일본의 항복 소식을 접한 김구는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할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다”라고 탄식하였다.
대신에 광복군은 국내정진군을 조직하고 그 선발대로서 국내정진대를 서울로 진입시켰다. 하지만 일본군의 서울 진입 불허로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복군이 미국 OSS와 합작하여 국내 진입작전을 추진한 것은 광복군 인면전구공작대가 영국군과 합작한 것과 마찬가지로 광복 직전 광복군이 거둔 귀중한 성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