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인물들
여성 한국광복군의 활동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
— 글. 김형목((사)선인역사문화원 연구소장)
국망國亡을 전후한 시기, 국채보상운동과 3·1운동에서 여성들은 학생은 물론 노파·주모·무녀까지 운동에 참여하며 민족해방운동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들은 엄혹한 식민 지배에도 굴하지 않고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인 자유와 평화를 위한 항쟁을 이끄는 에너지원이었다. 식민지 시기 민족해방운동으로서 여성운동은 이와 맞물려 진전을 거듭할 수 있었다. 국외에 거주하는 여성들도 예외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곤궁한 생활 속에서 자녀 양육은 물론 독립운동가 동지들의 생계까지 챙기는 등 헌신적인 활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 요인의 부인들이 보여준 활약상은 대표적인 사례로서 주목된다. 더욱이 군자금을 모금하거나 대적對敵 심리전에 앞장서는 한편 독립전쟁에 전사로서 직접 참여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여성들의 한국광복군이나 조선의용대에서의 활약은 대원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사선을 넘나드는 두려움과 고통을 감내하며 독립군 여전사로 거듭 태어났다. 그럼에도 일부 인물을 제외하고 이들은 역사 무대에서 사실상 잊힌 존재였다. 아니, 우리의 기억에서 철저하게 망각되거나 파편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일본군과 직접적인 전투와 선전활동을 통해 민족독립 쟁취에 목숨을 걸고 치열하게 싸웠다. 곧 항일무장투쟁만을 민족 모순을 극복하는 지름길로 인식하고 행동하는 데 몸을 도사리지 않았다. 엄혹한 처지에도 비관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향한 힘찬 진군을 계속하여 나갔다. 이리하여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감격스러운 민족 해방을 쟁취하는 조그마한 주춧돌이 되었다. 해방 이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도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소임을 다하는 대한민국 시민으로 거듭나는 본보기였다. 이들에게는 “부모나 자식보다 조국광복”이 우선적인 과제이자 실천적인 현안이었다. 인생 항로에서 보여준 숭고한 자세가 자라나는 세대에게 새로운 예지력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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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4월 11일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윤봉길 의거(일명 상하이 의거) 이후 “물 위를 떠도는” 상황에 직면했다. 1932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杭州→자싱嘉興→진장鎭江→난징南京→광저우廣州→구이린桂林→치장綦江→충칭重慶까지 이르는 대장정에 돌입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공습은 생명마저 위협하는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 다행히 중국국민당의 지원으로 근근이 생명줄을 부지할 수 있었다.
군사활동은 임시정부 수립 이래 꾸준히 추진하였으나 변화무쌍한 국제정세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기에 역부족이었다. 충칭에 안착한 임시정부는 외교활동과 더불어 군사활동에 중점을 두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설치를 결정했다. 마침내 1940년 9월 17일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김구 주석의 주재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이틀 앞서 김구는 광복군 창설에 대한 취지를 밝힌 선언문을 대내외에 발표했다.
한편 군대편성은 총사령부를 조직한 후 단위부대를 편성하는 방식이었다. 일본군과 맞닿는 시안에 총사령부를 설치한 후 지대를 편성했다. 1942년 초에는 조선의용대 편입으로 전면적인 개편을 단행함으로써 ‘구국간성’으로 거듭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조선의용대는 제1지대, 이전의 제1·2·5지대는 제2지대로 편성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6월에는 징모 6분처가 제3지대로 발전하여 광복군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현재까지 파악된 광복군은 700~800여 명에 달한다. 여성 광복군은 각 지대별로 30여 명 이상이 있었다고 한다. 이를 통하여 100여 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광복군의 일원으로 활동한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이들은 독립운동가 가정에서 출생하여 성장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광복군에 투신하였다. 김정숙·김효숙·민영주·신순호·오희영·조순옥·지복영 등이 대표적이다. 김정숙과 김효숙은 김붕준의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개방적인 사고로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들 자매는 임시정부 요인이나 가족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민영주는 민필호와 신창희(다른 이름 신명호) 사이에 2남 4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항일정신과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국내와 중국 동북지역, 미주와 연해주 등지에 알리는 데 혼신을 다했다. 어머니는 신규식의 외동딸로 임시정부와 운명을 같이 한 여성 독립운동가다. 민영주는 이러한 가정환경과 분위기로 일찍부터 항일의식에 남다른 관심을 가졌다. 충칭 방송국을 통한 심리작전 요원으로의 활동은 오늘날 여권신장을 이룬 조그마한 초석이 되었다.
신순호는 청주군 가덕면에서 아버지 신건식과 어머니 오건해 사이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 신순호는 상하이 독립운동의 기반을 마련한 예관 신규식의 조카로 본관은 고령이다. 4살에 어머니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여 아버지와 처음 만났다. 집안 분위기와 주위 환경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독립운동과 마주하게 되었다. 청년공작대에 입대하여 한중 연대에 의한 항일운동에 나섰고, 광복군 창립 때 오광심·김정숙·조순옥과 함께 여성 독립군으로 참가했다. 이후 박영준을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었다. 훗날 박영준은 자서전에서 자신의 결혼식을 “나라 잃은 설움도 잠시 잊고 모든 사람이 하나가 되어 기뻐하던 순간”이라고 회고하였다.
지복영은 지청천과 어머니 윤용자 사이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1924년 어머니를 따라 중국으로 가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다. 아버지는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26기생으로 졸업한 후 일본군으로 복무하다가 3·1운동 이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지청천은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였다. 지복영은 청년공작대에 참여하면서 항일운동의 최전선에 나섰다. 청년공작대는 주로 한국인과 중국인들의 항일의식 고양을 위한 선전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국인들에게 한국인의 항일정신과 기개를 선전하고 한국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공작이 중심이었다.
독립운동가 남편과 동지가 되어 광복군에 투신한 사례도 있다. 신정숙(다른 이름 신봉빈)과 오광심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정숙은 평북 의주군에서 태어나 1928년 충북 음성 출신인 장현근(다른 이름 송진표)과 결혼했다. 그는 망명한 남편을 찾아 상하이로 가서 극적으로 만났다. 윤봉길 의거로 안창호가 체포될 때 남편도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행방불명된 남편을 위해 임시정부의 이동 경로를 좇아가다가 광복군에 투신하였다.
오광심은 출생하여 부모를 따라 남만주로 이주하여 정의부에서 설립한 화흥중학 부설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한족회에서 설립한 배달학교와 류허현柳河縣 싼위안푸三源浦의 동명중학 부설 여자초등학교에서 항일의식을 일깨우는 민족교육 시행에 노력했다. 이때 조선혁명군 참모장인 백파 김학규와 부부이자 영원한 동지로서 인연을 맺었다. 일제의 만주침략과 만주국 설립으로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항일세력 활동은 상당히 위축되는 분위기였다. 당시 비장한 심정을 “님 찾아가는 길”에서 토로하였다. 이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동하자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이외에도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일제 경찰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후 광복군에 합류하는 경우도 있었다. 김영실은 쉬저우徐州의 요리점인 희락관 종업원으로 살아가는 처지였다. 광복군은 지하활동 거점과 학병 탈출 루트로서 김영실을 활용했다. 그녀는 동료들에게 광복군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스스로 나섰다. 김영실은 공적을 인정받았으나 이 외에 비밀공작원으로 활동한 임일옥과 이복순에 대한 존재는 희미하다.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이를 악물고 군사훈련에 임한 정인덕도 마찬가지다. 특히 ‘사상기생’들도 운동에 투신하는 등 다양한 출신이 존재했다. 아쉬운 부분은 이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이다. 광복군 출신 박영만이 소설 『광복군: 여명편』에서 가명으로 독립운동가 기생 나영옥을 기록한 부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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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대원들의 활동은 크게 초모활동, 선전활동, 구호활동으로 구분된다. 총사령부 성립전례식에는 오광심·김정숙·조순옥·지복영 등은 군복을 입고, 민영주·신순호는 사복을 입고 참석했다. 이들 6명은 바로 광복군 창설 요원이었다. 이들 중 오광심·지복영·조순옥 등은 시안에 파견되어 광복군 활동 기반 구축에 노력을 기울였다. 최전선인 이곳을 거점으로 초모활동과 선전활동을 줄기차게 전개했다.
초모활동을 위한 별도 기구인 징모분처徵募分處 5개소가 설치되었다. 회계조장 신정숙은 김문호 등과 함께 1941년 4월부터 간판을 내걸고 초모활동을 전개하였고, 짧은 기간에 약 20명을 모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들은 중국군 제3전구에 수용되어 있는 일본군 포로들을 심문하여 적의 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신정숙은 “국가지상, 민족지상, 유전출전有錢出錢, 유력출력有力出力” 등 대자보를 통해 선전활동에 몰두했다.
이들은 초모활동과 더불어 선전활동에도 중점을 두었다. 이는 광복군이 창설된 사실과 활동상을 대내외에 알리는 동시에 국내외 동포들의 참여와 지원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선전과는 대부분 여성 대원들로 구성되었는데, 오광심·지복영·조순옥 등이 임무를 맡았다. 선전활동은 목적과 대상이 매우 다양했다. 대상은 일본군 점령 지역에 거주하는 동포들과 일본군에 있는 한인 사병 등이었다. 일본군의 사기를 저하하는 선전활동도 병행되었다. 선전은 한국어·중국어·일본어 등으로 된 전단과 벽보를 만들어 살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선전활동의 주력 사업 가운데 하나는 기관지 발간이었다. 시안으로 이동한 직후부터 『광복光復』이 발행되기 시작했다. 기관지는 한국어본과 중국어본 두 종류를 발간하였다. 한국어본은 국내외 동포 중 적 후방에 거주하는 한인을 대상으로 삼았다. 반면 중국어본은 행정·군사·언론 기관 등이 주요 대상이었다. 여성 대원들은 원고 의뢰와 작성·번역, 발송하는 일을 맡았다. 이들은 직접 자신의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광심은 “한국 여성 동지들에게 일언一言을 들림”, 지복영은 “대시대는 왔다, 한국여성동지들아 활약하자”를 통하여 여성들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오광심은 국내외 각지에서 조국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는 여성들이 몇 명이나 있는지 반문하며 여성들의 활약을 요구했다.
방송을 통한 선전활동에도 여성 대원의 활약은 두드러지고 섬세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총사령부는 심리작전연구실을 설치하여 대적 심리 활동을 전개했다. 충칭의 국제 방송국에서 김정숙은 원고를 작성했고 신순호·지복영·민영주 등은 낭랑한 어조로 방송했다. 이와 더불어 연극공연과 음악회도 병행했다.
여성 대원은 구호활동과 더불어 세탁·재봉·요리 등을 담당했다. 또한 이들은 군사훈련과 더불어 초모공작을 위한 각종 정훈교육을 받았다. 군내 기밀에 대한 보안유지도 중요한 임무 중 하나였다. 이러한 활동들은 한국광복군 내 여성대원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수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한 여성 대원들의 삶과 애환이 보다 생생하게 재현되어 우리 곁으로 다가오기를 기대한다. 이를 위해 새로운 자료의 발굴·정리와 더불어 공개된 자료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이들을 우리의 기억 속으로 호출하고 정당하게 자리매김 시키기 위하여 서둘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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