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온 소식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 바친한국 독립군의 활약상을 보도한『독립신문』 기사
— 글. 채영국(前 독립기념관 책임연구위원)
한민족에게 올해는 일본 제국주의자들로부터 조국이 해방된 지 80주년이 되는 해이자 독립운동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인 청산리대첩이 있은 지 105주년이 되는 의미있는 해다.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한 시기부터 만주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은 항일무장활동을 위한 철저한 준비기간을 가졌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한민족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의지가 확고해지자 본격적인 활동을 위한 독립군단을 조직했는데 그 수가 수십 개에 이르렀다.
이들 만주의 독립군단들은 전투를 치를 만한 준비가 되는 즉시 국내로 독립군 유격대를 진격시켜 일제의 군경과 전투를 벌이거나 식민지 한국 강탈기관인 경찰주재소·헌병대·금융기관 등을 습격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러한 한국 독립군의 활동상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기관지인 『독립신문』에 비교적 자세히 보도해 해방을 열망하는 한민족 구성원의 자긍심을 높였다.
1920년 5월 8일 자 기사(“4월 18일 온성군의 격전 북한독립군활동상황”)는 북간도 독립군 지휘관들의 동정과 1919년부터 1920년 사이 겨울에 이루어진 독립군의 국내 진입유격전을 보도하고 있다. 내용인즉 홍범도·구춘선·서일·최명록·양하청 등 독립군 지도자들이 1919년 8월 이후 압록·두만강 결빙기에 한국 내 진입전을 실행하기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고 무기를 구입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 같이 준비한 후 1920년 3월 15일부터 27일까지 2백 명 또는 수십 명으로 유격대를 조직해 8회에 달하는 무장활동을 펼쳤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리고 3월 15일의 온성 풍리동 경찰 주재소 습격, 17일 미포면 월파동에서 군자금 모집, 18일 오전 1시경 미포면 장덕동에서 군자금을 모금하고 첩자 1명 총살, 같은 날 오전 6시경 온성군 성벽을 점령하고 일본군과 약 50분간 교전, 같은 날 오전 9시 반 정탐 중이던 일본 기마병과 독립군 교전, 같은 날 오후 5시 독립군 재차 온성을 향해 총공격을 단행해 일제의 경찰관 30명, 헌병 13명, 일본군 26명의 연합 병력과 교전함, 3월 26일 오후 9시 약 50명의 독립군이 유포면 남양동의 일본군 공격, 3월 27일 오후 8시 반에는 장소는 불명이지만 독립군이 일본군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는 사실을 보도하고 있다.
이 같은 독립군의 국내진입 유격전은 1920년 중반으로 가면서 더욱 활발히 전개되었다. 독립군의 공격에 의해 많은 일제의 침략기관이 파괴되고 일제의 군경대와 친일파들이 척결되었다. 이에 일제는 자신들을 공격한 후 만주의 본부로 귀대하는 독립군을 추격하기에 이르는데 그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삼둔자전투와 봉오동전투다.
그에 대한 기사는 1920년 6월 22일 자 『독립신문』에 “독립군 승첩”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6월 4일 새벽 5시경 약 20명으로 구성된 독립군 유격대가 종성에서 북방으로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강양동으로 진입하고자 행군하고 있었다. 이 행군 중이던 독립군 유격대는 도중에서 척후 활동을 벌이고 있던 일제의 헌병 순찰대를 만났다. 이에 독립군은 일 헌병대와 전투를 펼쳐 승리한 후, 다시 두만강을 넘어 만주의 삼둔자 부근 진영으로 돌아왔다. 독립군의 공격으로 피해를 입은 일제 헌병대는 보복을 가하고자 일본군 중위 니이미新美가 지휘하는 국경수비대인 남양수비대 병력 1개 중대에 헌병중대를 합해 연합추격대를 조직해 두만강을 넘어왔다. 이들 일본군 추격대가 삼둔자의 한인마을까지 쳐들어오는 것을 간파한 독립군들은 잠복 대기하고 기습 공격을 가해 또다시 승리를 거두었다. 일제는 이 전투에서 독립군 한 명을 죽이고 두 명을 부상시켰으며 자신들은 사상자가 없다는 허위주장을 했다고 『독립신문』은 보도하고 있다.
『독립신문』 제74호(1920. 5. 8.)
『독립신문』 제85호(1920. 6. 22.)
이는 일본군 측이 자신들의 사기가 꺾이지 않도록 은폐해 발표한 것이었다. 이 전투 이후 곧바로 더 많은 병력으로 전투부대를 편성해 니이미의 국경수비대를 지원해 온 것만 봐도 삼둔자에서의 전투는 독립군의 승리였음을 알 수 있다.
삼둔자전투의 패배를 보고 받은 일본군 상부는 야스카와安川 소좌를 대장으로 한 ‘월강추격대’를 편성해 두만강을 넘게 했다. 월강추격대는 240여 명의 대대병력이었다. 여기에 삼둔자전투에서 살아남은 니이미 부대의 병력이 합해져 한국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한 대규모 일본군 공격대가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들 일본군이 대규모 병력으로 독립군의 근거지인 북간도로 침입해 오기 바로 직전 이 보도기사에는 게재되지 않았지만, 독립군도 각 독립군단을 합한 대규모 연합 군단을 형성했다. 명칭은 ‘대한북로독군부’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가 이끈 국민회군 등이 연합한 대군단이었고, 왕청현 봉오동에 근거지를 만들고 주력부대를 주둔시켰다.
일본군 추격대는 이 독립군 대군단의 존재를 파악하고 봉오동을 공격 목표로 정했다.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모양의 지형이었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는 입구에서부터 하동·중동·상동의 순서대로 한인마을이 형성되어 있었다. 독립군 사령부는 이들 한인마을의 주민들을 대피시켜 마을을 텅 비게 한 후, 독립군 병사들을 야산의 곳곳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분대장 이화일이 인솔하는 독립군 병력을 봉오동 골짜기 입구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배치해 일본군들을 유인하도록 했다. 독립군의 이 작전계획에 일본군은 완전히 걸려들었다.
6월 7일 새벽 3시 50분부터 이화일 분대의 유인에 따라 끌려오기 시작한 일본군 추격대는 5시경 봉오동 입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독립군의 1차 집중 공격을 받았다. 공격을 받아 크게 분노한 일본군은 날이 밝아진 오전 8시 30분경 봉오동 입구를 통과해 첫 번째 한인마을인 하동의 주민에게 퍼붓기 위해 가옥 곳곳을 수색했다. 그러나 마을은 텅 비어있었다. 이를 확인한 일본군은 독립군 무리를 찾기 위해 계속해 골짜기로 들어 왔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1시경 일본군 전위부대가 상동 마을 앞 골짜기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고 추격대 전체가 봉오동에 갇히는 형국이 되었다. 이에 홍범도 사령관의 공격 명령이 내려졌고 매복해있던 독립군들은 일제히 집중 사격을 가했다. 혼비백산한 일본군은 제대로 응전 한번 못하고 대패하고 말았다. 약 3시간에 걸친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15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봉오동전투는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알리는 서막이 되었다. 『독립신문』 한 회분의 한정된 지면이기에 독립군의 봉오동 승첩을 상세히 알리기는 어려웠으나 이 같은 보도는 일제 치하 곳곳에서 신음하는 한민족에게 조국이 기필코 독립할 수 있다는 큰 믿음을 주었다.
『독립신문』 1920년 12월 25일 자 ‘북간도에 재한 아독립군의 전투정보’는 앞에서 소개한 삼둔자전투, 봉오동전투와 함께 한국 독립운동사상 가장 빛나는 승첩이라 일컬어지는 청산리대첩에 대한 보도기사다.
청산리대첩은 서북간도에 근거지를 가진 여러 한국 독립군단들이 연합한 대규모 독립군 세력과 2개 사단 규모의 일본군이 대소 10여 회 전투를 치른 것으로,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맞붙은 전쟁이라 인식해 ‘청산리 독립전쟁’이라 명명한 연구자도 있다.
수시로 행해진 재만 독립군의 국내 진입 유격전, 그리고 독립군을 추격해서 이루어진 삼둔자·봉오동 전투 등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된 일제는 독립군을 섬멸시키지 않고서는 식민지 한국을 제대로 통치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일제는 1920년 8월 본격적으로 한국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한 ‘간도지역불령선인초토계획’이라는 군사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서북간도의 독립군 근거지를 목표로 사방에서 군사를 동원해 공격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동쪽에서는 시베리아 파견 일본군, 북쪽에서는 북만주 파견 일본군, 서쪽에서는 관동군, 그리고 남쪽에서는 작전을 주도한 한국의 나남과 용산에 주둔한 일제의 조선군 제19, 20사단이 있었다. 침략에 동원된 일본군의 병력은 약 2만 명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청산리대첩은 이들 일본군이 서북간도로 침입해 한국 독립군의 근거지와 그곳의 한인 사회를 대상으로 만행을 저지르는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일본군은 1920년 10월 2일부터 한국 독립군을 공격하기 위해 서북간도 침입을 시작했다. 독립군 근거지를 향해 행군하는 과정에서 일본군들은 수많은 한인마을을 약탈·방화하고 조금이나마 반항하는 한인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했다. 그런데 일본군들이 만행을 자행하며 독립군을 쫓아오고 있을 때, 독립군들은 이들의 서북간도 침입을 사전에 감지하고 근거지를 떠나 백두산록 서쪽으로 이동 중이었다.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광복단·신민단 등 독립군단들이 일본군의 공격을 일시적으로 피하는 피전책避戰策을 택해 미리 백두산 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던 것이다. 단지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만이 사관연성소의 제1회 졸업식 행사가 있어 그를 끝내고 다른 독립군단들보다 늦게 출발하였다.
그에 대한 기사가 본문 중에 “육군무관학교제1회 졸업식을 행하고 …왕청현 대감자를 경하여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 주군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먼저 출발한 대한독립군·군무도독부 등의 독립군 병사들이 화룡현 청산리에 주둔하고 있을 때 북로군정서 독립군들이 연성소의 졸업생들과 뒤늦게 청산리로 왔던 것이다.
독립군을 공격하는데 성과를 내지 못하고 한인 사회에 들어가 무고한 한인들만 희생시키고 있던 일본군들은 청산리에 독립군들이 집결해 있다는 첩보를 얻어냈다. 독립군의 소재를 파악한 즉시 일본군 침략군 중 육군 소장 아즈마 마사히코東正彦가 이끈 약 5천 명의 병력이 청산리로 향했다. 이 같은 일본군의 동정 또한 짧은 시간 내에 독립군에게 파악되었다. 아무리 일본군들이 일반한인을 겁주고 탄압한다 한들 당하고만 있을 한민족이 아니었다. 일본군이 청산리로 향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달려가 그 동정을 독립군에게 알렸던 것이다.
일본군이 도착하기 전 독립군은 백전노장 홍범도를 총사령관으로 한 연합군을 편성하고, 신문기사에 보이듯 군사를 배치해 백운평·이도구·삼도구·완루구·북완루구·어랑촌·천수평 등에서 접전을 벌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기사에 나오지 않은 맹개골·만기구·쉬구·천보산·고동하곡 전투 등이 더 있었으며 이들 전투에서도 어느 정도 독립군의 손실이 있기는 하였으나 모두 승리하였다.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했으며, 독립군 측의 전사자는 130여 명이었다.
그 시기 최고의 무기를 사용하며 한국 독립군을 공격한 일본군을 이같이 응징했음을 『독립신문』은 온 천하에 알렸다. 봉오동과 청산리대첩은 한국 독립군이 1920년 6월과 10월 한 해에 두 번씩이나 침략자 일제의 막강한 군대를 패퇴시킨 대첩이었다. 그것도 침략의 본토인 한국이 아닌 만주로 대병력을 불러들여 독립군의 의기와 힘을 보여준 전투였다. 이들 두 승첩은 만주의 한국 독립군이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불굴의 정신으로 항일 무장활동을 펼칠 수 있는 자신감과 힘의 원천이 되었다.
『독립신문』 제88호(1920. 1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