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미국 외교
— 글.김도훈(한국교원대학교 연구교수)
1914년 일어난 제1차 세계대전은 4년이 지난 1918년에야 마무리되었다. 이후 전후 처리와 국제질서 재편을 둘러싸고 관련 당사국들은 두 차례에 걸쳐 국제회의를 개최했다. 1919년 파리강화회의와 1921년의 워싱턴회의가 그것이다.
파리강화회의 개최 전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안한 민족자결주의는 식민지 국가들로 하여금 독립에 대한 희망을 품게 만들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승전국인 연합국이 패전국인 동맹국(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독일제국, 오스만제국 등)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과 배상 등을 묻기 위한 자리였다. 따라서 식민지 국가의 독립은 패전국의 식민지에 해당하는 사항이었을 뿐이었다. 한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가한 일본의 식민지였기에 이에 해당하지 않았다. 예상대로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회의 결과는 미국의 초강대국으로 부상, 연합국의 일원이었던 일본이 동아시아 신흥 강국으로 자리 잡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만주에 대한 반영구적 지배권을 확보한 일본의 동아시아 지역으로의 팽창은 향후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진출하려는 영국과 미국의 입장에서 보면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국 등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의 동아시아 팽창정책을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이 제안한 회의가 1921년의 워싱턴회의였다.
국제정치는 강대국들의 이익과 상호 견제가 작용한다. 따라서 당시 열강들은 일본의 식민지였던 한국인들의 독립 호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설령 한국의 독립에 대해 관심을 보였더라도 일본의 팽창정책이 자국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식민지였던 한국의 입장에서는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면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버릴 수 없는 처지였다. 따라서 파리강화회의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1년 워싱턴회의 외교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1919년 3·1운동의 결과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이하 임시정부)는 ‘정부 승인’이라는 외교적 목표를 세우고 미국 등 연합국을 상대로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전개했다. 1919년 8월 이승만은 한성임시정부 집정관 총재 명의로 워싱턴 D.C.(이하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Korean Commission)를 설치하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구미위원부는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필리델피아와 시카고에는 통신부를 두었다. 또한 유럽인 영국 런던과 프랑스 파리에도 사무소를 설치하고, 북미·하와이·멕시코 등에는 지방위원부를 설치했다.
대한민국공채표(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50달러 독립공채)
구미위원부는 1919년 4월 서재필이 이끈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의 활동을 이어받아 확장한 것이다. 구미위원부는 한국통신부 시절인 1919년 5월 미국인을 중심으로 조직했던 한국친우회韓國親友會(The 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미국 21개 도시와 유럽의 런던과 파리까지 확장하며 회원 2만 5천 명을 확보했다. 또한 한국통신부에서 발행한 영문 잡지 『한국평론(Korea Review)』과 다양한 선전 책자를 만들어 배포하며 구미歐美 각국에 한국의 독립을 선전하는 활동을 지속했다.
구미위원부의 활동 중 가장 큰 활동은 워싱턴회의 참가였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개최된 워싱턴회의(1921.11~1922.2)는 미국, 영국, 일본 등 9개국 대표단이 군비 축소와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국제회의였다. 이 회의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일본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서로의 권익을 보장하는 가운데 상호 협력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었다.
워싱턴회의 개최 소식을 임시정부에 가장 먼저 알린 인물은 서재필이었다. 서재필은 1921년 7월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이 사실을 알리며 외교 활동과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서재필의 요청에 임시정부는 구미위원부에 모든 사항을 위임했다.
이미 1919년 파리강화회의 실패를 경험한 임시정부는 워싱턴회의를 독립운동의 마지막 외교 무대로 인식했다. 물론 임시정부를 비롯한 한국 측 그 누구도 워싱턴회의에 초대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당시 임시정부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자신을 단장으로 한 대표단을 꾸렸고, 임시정부는 이를 적극 후원했다. 1921년 9월 임시정부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은 대표단은 워싱턴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의제로 상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 대표단이 아무런 국제상 지위도 없고, 공식 초대로 받지 못한 미자격 대표단이며, 1차 세계대전 5대 승전국 중 하나인 일본의 식민지라는 점을 거론하면서 한국 대표단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당연히 한국의 독립 문제는 워싱턴회의 의제로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따라서 파리강화회의에 이어 두 번째 외교 활동 무대였던 워싱턴회의에서도 참가조차 못 하는 결과를 빚었다. 워싱턴회의 참가 무산으로 재미 한인들은 구미위원부에 대해 냉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는 재정 지원의 급격한 감소로 나타났다. 이후 구미위원부는 겨우 사무실만 유지하며 사실상 활동을 마감하게 된다. 또한 미국과 일본이 충돌하여 전쟁이 일어나길 기대했던 바람과는 달리, 미일 간에 친밀한 관계가 유지되자, 1937년 중일전쟁까지 별다른 외교 활동을 전개할 수도 없었다.
임시정부는 오랜 기간에 걸친 유랑생활을 정리하고 1940년 9월 충칭에 안착했다. 충칭에 자리를 잡은 임시정부는 본격적으로 일본과의 전쟁 준비에 돌입했다. 9월 17일 창설된 한국광복군이 그것이다. 광복군 창설과 함께 임시정부는 미국을 대상으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41년 6월 임시정부는 미국 대통령과 국무장관에게 임시정부 승인과 원조, 국제회의에 한국 대표 참가 승인을 요청했다.
ⓒ독립기념관
김구의 통고문이 실린 『주미외교위원부 통신』 (제122호, 1945. 11. 27.)
임시정부의 대미 외교는 재미한인사회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1941년 4월 북미와 하와이 한인 단체 대표들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이하 한족연합회)를 창립했다. 한족연합회는 임시정부 후원, 독립운동 확대를 위한 외교와 선전, 미국의 국방사업 후원을 주된 목표로 설정했다. 한족연합회는 외교와 선전 활동을 전담하기 위해 주미외교위원부(이하 주미외교부)를 설치한 뒤, 임시정부에 승인을 요청했다. 이에 임시정부는 주미외교부를 추인하고 임시정부 외무부 산하로 편입시켰다. 주미외교부 위원장은 이승만이었다. 한편, 한족연합회는 임시정부 후원을 위해 ‘독립금’ 명목으로 재정을 마련하여 전체 재정의 2/3를 임시정부로 송금했다. 나머지 1/3은 미주에서 사용할 외교와 국방공작 후원경비로 사용하기로 했다.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주미외교위원부 협찬회 일동
1941년 진주만 공습 다음 날인 12월 8일 미국이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하자, 임시정부도 다음 날인 12월 9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면서 이승만에게 대미 외교 활동을 지시하였다. 주미외교부는 미국정부에 임시정부 승인과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주미외교부는 1942년부터 3년 동안 미국 국무부·전쟁부·백악관 등에 임시정부 승인과 무기 대여를 30여 차례에 걸쳐 요청했다. 이외에도 한미협회 등 미국인 중심의 후원단체를 조직하여 미국 정부 각 부처에 임시정부 선전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 중 성과를 거둔 것은 1942년 2월 말 워싱턴에서 열린 대한인자유대회였다. 한족연합회와 주미외교부가 공동 주최한 이 대회에는 미국인 회원 상당수가 참석하여 연설했다. 미국인 회원들은 한국의 독립, 임시정부 승인, 이승만 지지를 표명하는 한편, 미국 정부에 임시정부 승인을 호소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러나 1942년 초 미국 국무부는 임시정부 불승인과 함께 신탁통치 실시를 정책 방침으로 결정했다. 이러한 미국의 방침에 대해 임시정부는 격렬하게 반대했다. 임시정부는 주미외교부를 대미 외교 통로로 단일화했지만, 1943년 중반부터 재미한인사회는 이승만을 정점으로 하는 주미외교부를 둘러싸고 갈등을 빚었다.
임시정부는 1944년 8월 주미외교부를 폐지하고 주미외교위원회(이하 주미위원회)를 신설했다. 위원장은 그대로 이승만이 맡았다. 그러나 내부 갈등이 깊어진 관계로 주미위원회는 전처럼 전폭적 지원을 받기 힘들었다. 이후 이승만은 대미 외교보다는 한미협회의 공동 행사, 또는 이승만 개인 선전에 중점을 두었다. 이로 인해 재미한인사회에서는 이승만의 외교 활동에 대해 적지 않은 비판이 일었다.
주미위원회의 마지막 활동은 1945년 4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합국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한 것이었다. 이승만을 단장으로 하는 대표단은 임시정부 승인이 주된 목표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이 소련에 한국의 지배권을 양도했다는 이른바 ‘얄타밀약설’을 제기했다. 게다가 중국과 미국 국무부 관리를 공산주의자로 비판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임시정부가 원하던 정부 승인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탄생한 임시정부의 최종 목표는 국권 회복이었다. 비록 국민들의 열망에 의해 탄생한 정부이지만, ‘임시’가 아닌 ‘정식’ 정부가 되기 위해서는 독립은 반드시 이루어야만 하는 과제였다.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주미외교위원회 주최로 워싱턴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 참석자들
독립운동 방략에는 흔히 독립전쟁론, 실력양성론, 외교론 등이 거론된다. 이 세 가지 방법론은 독립을 전제로 할 때만이 의미가 있다. 독립을 전제로 하지 않는 실력양성론이나 외교론은 자치론에 빠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국제 정치에서 외교는 강대국들의 이권 경쟁이자 견제의 수단이었다. 이 엄혹한 현실 속에서 강대국을 상대로 외교를 펼친다는 것은 애초부터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더구나 약소국도 아닌, 식민지에서 주장하는 논리를 받아들일 강대국은 없었다. 이런 인식은 안창호의 국제 인식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한계를 알면서도 임시정부가 외교 활동을 펼친 이유는 독립이라는 절대 가치를 이루기 위한 고육지책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