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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정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외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정부로서 활동하는 데 많은 제약이 따랐다. 이에 수립 초기부터 국내 행정을 원격으로 통제하고, 국외 동포사회를 이끄는 데 힘썼다. 국내에는 주요 지역과 통신 연락을 담당하는 교통국을 설치하고, 지방행정제도인 연통제를 시행했다. 국외에는 대한민국 2년(1920) 3월 「임시거류민단제」를, 10월 이를 개정한 「임시교민단제」를 공포하고 민단제를 시행했다. 임시정부는 국내외에 설치한 기관과 특파원을 통해 동포들로부터 세금을 징수하고, 정보를 입수하며, 정부의 소식을 전했다.
  • 군사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민개병제에 따라 국내외 동포들로 군대를 편성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원년(1919)에 육군무관학교를 세우고, 이듬해인 1월에는 대한적십자회의 주관으로 간호원양성소를 부설기관으로 열어 독립전쟁에 필요한 남녀 간호병을 길러냈다. 또한 그해 7월에는 공군 창설을 꿈꾸며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처 윌로우스에 한인비행사양성소를 설립했다. 대한민국 16년(1934)에는 중국 육군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해 독립군 간부를 육성했다. 중일전쟁 이후 군사위원회와 군사특파단을 조직하며 군대 창설을 본격화한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22년(1940) 9월 17일 충칭에서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을 창설했다. 광복군은 연합군과 공동 작전을 펼치며 자주 독립을 이루기 위해 끝까지 싸웠다.
  • 경찰, 특무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할 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장정」에 경찰기구 조직 내용을 담았다. 상하이 시기 경찰은 중앙경찰 기구인 ‘경무국’, 지방경찰기구인 ‘경무사’, 교민단의 ‘의경대’ 등으로 구성했다. 경찰 조직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잠시 축소 되었다가 충칭 시기 경무국이 ‘경무과’로 개편되고 ‘경위대’가 창설되면서 다시 강화되었다. 임시정부의 경찰은 정부 요인들을 경호하고, 교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뿐만 아니라 국내외 정보를 수집하고, 일본 밀정을 수색해 처단하는 등 독립운동에도 힘썼다. 특히 경위대는 요인 경호와 함께 임시정부 청사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을 해냈다.
  • 문화·교육·구호 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암울한 현실 속에서도 다양한 문화·교육·구호 활동을 전개했다. 국제 사회에 일본 침략의 진상과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알리려고 『한일관계사료집』을 편찬했다. 또한 『독립신문』을 발행해 국내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 소식을 전했다. 상하이 시기에는 한중호조사, 충칭 시기에는 한중문화협회를 결성해 중국 정계·문화계 인사들과 활발히 교류하며 연대 투쟁의 저변을 넓혀나갔다. 교육에도 힘써 인성학교 등을 운영하며 동포의 자녀들에게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또한 대한적십자회를 세워 국제적십자사로부터 승인을 받아 국제적 위상을 확립하고 국민 보건을 향상시키는 데 기여했다.
  • 외교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의 독립 보장과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내기 위해 다양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파리강화회의·국제사회당대회 등 국제회의에 대표를 보내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대한민국 3년 (1921) 외무총장 신규식은 임시정부와 중국 호법정부가 서로 승인하는 성과를 올렸다. 국무총리 이동휘는 러시아에 특사를 파견해 정부 승인과 독립운동 자금 지원을 약속받았다. 구미위원부는 미국 정부와 교섭하고 미국 전역에서 한국친우회의 조직을 주도했다. 임시정부의 외교 활동은 국제 사회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크게 부각시켰고, 대한민국 25년(1943) 「카이로 선언」을 이끌어내는 밑거름이 되었다.
  • 재정활동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를 운영하고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 다양한 재정 활동을 벌였다. 임시정부는 대한민국 원년(1919) 6월 「임시징세령」, 「인구세 시행세칙」을 공포하며 인구세 제도를 시행했다. 모든 국민이 납세 의무를 지는 ‘국민 개납 주의’를 채택한 것이다. 이 밖에도 임시정부는 임시소득세 징수, 애국금·의연금 모금, 독립공채 발행, 외국 차관 등을 통해 재정을 확보했다. 국내에서 활동한 임시정부 특파원은 전국에서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 만세운동 1910년 일본이 강점한 뒤, 우리 민족은 식민 통치 아래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냈다. 이에 종교계 지도자들과 학생들은 비밀리에 독립 선언과 만세 시위를 추진했다. 1919년 3월 1일, 서울과 평양 등 대도시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는 전국으로, 북간도·연해주·미주 등 국외 한인 사회로까지 퍼져나갔다. 독립만세운동에는 남녀 노소·신분·계급을 넘어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3·1운동은 자유·정의·인도·평화 사상에 바탕을 둔 우리 민족 최대의 독립운동으로 민중이 스스로 독립운동의 주체이자 나라의 주인임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