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
1910년 우리나라는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강제 합병되었어요. 이 시기 일본은 우리말을 금지하고, 재산을 강제로 뺏어가는 등 우리나라 사람들을 억압하였습니다.
국민회 하와이 지방총회 임원들(1909)
을사늑약 체결 당시 대안(한)문 앞에 서있는 일본군들(1910)
신민회 회원들이 일제에 끌려가는 모습(1911)
독립의군부 관리 임명 고종 칙명(1912)
안창호와 흥사단원들(1913)
대조선국민군단의 훈련 모습(1914)
신한청년당의 기관지 『신한청년』(1918)
북로군정서 청산리전투 승전 기념 사진(1919)
을사늑약 체결 당시 대안(한)문 앞에 서있는 일본군들(1910)
주권을 빼앗긴 우리는
1919년 3월 1일 마침내 독립선언서와 함께
자주 독립을 외치며 만세운동
을 벌였어요.
사람들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며 자유로운 나라를 되찾고자 했어요.
3·1운동은 약 1년간 전국 방방곡곡에서 일어났어요.
비록 3·1운동 후
바로 독립을 이루진 못했지만 국민들의 마음 속에 독립 의지를
굳게 세운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3·1운동으로
전 세계에 한국인의 독립 의지
를 알릴 수 있었어요.
우리의 외침은
어린이부터 여성, 노인까지 참여하는 모두의 것이였고, 우리 스스로 맨손으로 이루어낸 평화적인 외침 이었습니다.
숨죽여 지내던 모두가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휴대폰도, SNS도 없었지만 만세운동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일본의 압박을 피해
전 세계에 퍼져 있던
한국인들도 함께 만세를 불렀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일본의 탄압은 계속되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통해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어요.
독립운동가들은 조직적으로 이 뜻을 이어 독립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정부 조직
을 세웠어요.
이러한 조직은 국내와 국외
에서 여러 개가 설립되었고, 1919년 9월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하여 활동하게 되었어요.
우리 민족은
3·1운동을 통해
독립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주었어요.
독립운동가들은 조직적으로 이 뜻을 이어 독립된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정부 조직
을 세웠어요.
이러한 조직은 국내와 국외
에서 여러 개가 설립되었고, 1919년 9월 마침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하여 활동하게 되었어요.
통합된 임시정부는 상하이에서 활동했지만, 일본의 탄압을 피해 중국 각 지역을 옮겨 다니며, 우리의 독립운동을 이끌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정부로서 여러 가지 활동
을 하였어요.
행정부터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 한국광복군 설립 등 국방활동, 세무, 교육, 역사 편찬에 이르기까지 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어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민족의
유일한 정부로서 여러 가지 활동
을 하였어요.
행정부터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 한국광복군 설립 등 국방활동, 세무, 교육, 역사 편찬에 이르기까지 정부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어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시작,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이 독립된 국가로 인정 받기 위해 세계 여러나라와의 외교적 노력을 펼쳤습니다.
지속적인 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운영자금은 국민들의 소중한 후원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상하이에 세워졌기 때문에 국내 각 지역까지 소통하기 위한 임시연통제를 운영했습니다.
대한적십자회를 세워 간호병을 양성하였으며 국제적십자사로부터 인승 노력과 국민 보건 향상에 기여했습니다.
국내외 국민들에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상황을 알리고 민족 의식을 모으기 위해 발간한 독립신문은 창간 당시에는 <독립>이란 이름으로 발행되다가, 10월부터 <독립신문>으로 바꾸어 발행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여 독립운동을 후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정부에서 발행하는 소식지 <공보>를 통하여 정부의 활동들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한국의 역사와 일본의 침략사를 자세하게 기술한 <한일관계사료집>은 일본이 한국을 침략한 것에 대한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임시사료편찬회를 발간하였습니다.
국내의 한성정부,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3개의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마침내 통합되었습니다.
통일 내각을 이루어 성립되었음을 선포하고, 우리 민족이 더 이상 일본의 노예나 전체 정치 아래의 백성이 아닌 민주국의 자유민임을 밝혔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자금 모집을 위해 공립공채를 발행했습니다. 독립공채 발행에 따른 세부 사항을 19개조로 정리해 알렸습니다.
먼 땅 상하이에서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함께 모여 기념일을 지켜 나갔습니다.
독립을 위해 당시 첨단 기술인 항공에 주목하고, 비행사 양성소를 설립하여 30여 명의 학생들에게 무선 통신, 사격, 말타기, 영어 등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임시정부 성립의 계기가 된 삼일절을 국경절로 정하고 성대한 기념식을 거행했습니다.
간도 지역 활발히 펼쳤던 독립운동가들의 무장투쟁 승리는 우리 국민들에게 큰 힘을 주었습니다.
봉오동 승리에 이어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본 정규군 상대로 일구어낸 값진 승리였습니다.
신년을 맞아 독립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했던 58명의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자주적 독립을 위한 임시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계속 되었지만, 미국, 영국 등 강대국들의 이해 관계 속에서 큰 힘을 얻지는 못하였습니다.
임시정부의 개혁과 독립운동에 대한 국민들의 높은 관심으로 전국의 대표가 한 자리에 모여 임시정부 앞날의 방향을 논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국무위원들이 평등한 권한과 의무를 가지고 국정을 운영하는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한 것이 제3차 개정헌법이었습니다.
한인애국단은 의열투쟁으로 독립에 대한 의지를 알리고 쟁취하여 큰 변화를 이루고자 하였습니다.
이봉창 의사(1900-1932)는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에 건너가 일왕을 제거하기 위해 폭탄을 던졌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습니다. 국내외 독립운동에 새로운 동기를 주었습니다. “나는 적성(참된 정성)으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서”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1908-1932)는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탄을 던져 일본 제국의 주요 인사들을 제거하거나 타격을 입혔습니다. 윤봉길 의거는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큰 영향을 끼칩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의 강경한 독립운동에 일본의 탄압은 거세어져 갔고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떠나 중국 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상하이에서 임시정부가 운영했던 공립학교인 인성학교도 일본의 압력 등으로 문을 닫게 됩니다.
피신한 임시정부는 중국의 전장으로 다시 이동합니다.
국민들에게 임시정부를 말살하려는 주장에 맞서 일어나 임시정부를 지켜줄 것을 호소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동 속에서도 우리의 삼일절을 기억하며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국광복군 결성하기 위해 청년들은 모집하고자 결성되었습니다.
중일전쟁(1937-1945)으로 인한 상황에 따라 임시정부는 광저우로 이동하며 활동하게 됩니다.
임시정부는 약 4개월간 광저우에 머물다 류저우로 이동하게 됩니다.
임시정부의 가장 큰 공연이었던 삼일절 기념 공연, 위로금 모금공연 등에 일본에 대항하는 내용은 담은 공연 활동으로 독립의 의지와 단결에 앞장섰습니다.
2년 남짓한 사이 류저우를 거쳐 치장에 머물게 됩니다.
중국 내륙 깊숙한 충칭까지 피난하여 청사를 다시 마련하게 됩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 군대인 한국광복군을 정식으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즉각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고 한민족의 자주 독립 의지를 전세계에 알리게 됩니다.
임시정부는 독립된 나라에 대한 구상과 미래를 준비합니다.
제34회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회의는 좌우 세력의 대표들이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부대 한국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영국군과 활동을 펼칩니다.
이집트 카이로에 모인 미국, 영국, 중국 정상들은 일본과의 전쟁과 전쟁 후 처리 문제에 대해 합의하며 훗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명시했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도 조직을 정비하며 해방을 준비합니다.
미군과 국내 진입을 위한 특수작전을 비밀리에 준비합니다.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대한민국은 마침내 해방을 맞이합니다.
광복을 맞이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충칭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국민들은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27년간 노력해온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을 열렬히 환영하며 반기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