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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정부의 인물들

백범과 함께한 안공근과 엄항섭

임시정부의 인물들

백범과 함께한 안공근과 엄항섭

안공근과 엄항섭은 백범 김구를 가까이에서 보좌하며 한인애국단과 특무조직 운영, 정보 수집과 선전 활동을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항일투쟁과 독립운동 기반 강화에 힘썼다.

― 글. 장석흥(국민대학교 한국역사학과 명예교수)

일제의 상하이 침공과 백범의 항일전략

백범은 1932년 윤봉길 의거 후 “나는 안공근, 엄항섭 두 사람을 가만히 불러 부탁했다. 이후로 군 등의 집안 생활을 내가 책임질 테니 오로지 우리 사업에 전념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 사업이란 백범이 주도한 한인애국단과 한국특무대독립군과 같은 항일전략에 전념해달라는 주문이었다. 1920년대 후반 이후 193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임시정부 청사의 월세까지 밀릴 정도로 극도의 경제고에 시달렸다. 이 무렵 길거리의 배추 쓰레기를 주워다가 삶아 먹었다는 일화는 당시 임시정부의 경제적 사정을 잘 말해주고 있다.
생활고 속에도 백범의 항일투쟁은 끊이지 않았다. 이 무렵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편지정책’을 동원해 미주 동포들의 지원을 요청했다. 1930년대 초 일제가 만주 침공 후 괴뢰 만주국을 세우고, 상하이를 침공하는 일이 벌어졌다. 서구열강의 만주에 대한 높은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기 위해 성동격서식으로 상하이를 침공한 것이었다. 백범은 일제의 상하이 침공을 정면에서 목격했다. 상하이가 한국독립운동의 최전선으로 변모한 것이다. 백범은 한인애국단을 만들고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를 일으키며 세계를 진동시켰다. 백범이 한인애국단의 단장을 맡고, 안공근이 총괄 업무를 담당했다. 윤봉길 의거는 독립운동의 촛불이 거의 꺼져가는 상황에서 회생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후 한국독립운동은 활력을 찾을 수 있었다. 이번 글에서는 백범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안공근과 엄항섭의 역할을 살피기로 한다.

한인애국단의 설립과 안공근

©독립기념관

안공근


©독립기념관

뤼순감옥 수감중인 형 안중근을 면회하는 안공근의 모습(1909. 12. 13.)

안공근安恭根은 안중근의 막냇동생으로 백범과는 처음 황해도 청계동에서 만났다. 백범이 열아홉 살, 안공근이 여섯 살 때의 일이었다. 그 후 독립운동의 현장에서 두 사람이 재회한 것은 1919년 상하이의 임시정부에서였다. 안공근은 러시아로 유학한 뒤 연해주에서 거주하다가 1919년 임시정부에 참가했다. 안공근은 임시정부의 외교원, 임시의정원과 1920년 12월 상하이대한인거류민단의사회 의원, 1926년 2월 상하이한인교민단장에 임명되어 한인들의 결속에 힘을 쏟았다. 안공근은 1920년대 중반 이래 임시정부를 유지ㆍ옹호하는 차원에서 백범과 정치노선을 같이하고 있었다.
안공근은 1930년 상하이에서 백범 등이 한국독립당을 창당할 때 힘을 모았다. 안공근은 이동녕·안창호·김두봉·이유필·조소앙 등과 함께 “당의黨義와 당강黨綱을 기초하고 그것을 가결하는” 7인의 기초위원에 선발되었다. 이 무렵부터 안공근은 항저우와 난징 등을 오가며 백범을 최측근에서 보좌했다. 1931년 9월 일제가 만주를 침공하자, 임시정부는 특무대를 조직하여 의열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임시정부가 의열투쟁을 강구한 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유명무실 상태에 빠진 임시정부의 활성화를 위한 방책으로 시도된 것이다. 당시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은 “군사공작을 못한다면 테러공작이라도 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백범에게 한인애국단의 조직과 운영을 일임했다. 1931년 11월경 백범은 한인애국단의 단장에 올랐다. 안공근은 참모로서 단원의 모집과 관리·통신연락·정보수집·특무활동 등에 관한 모든 일을 총괄했다. 단원은 이봉창·윤봉길·엄항섭·김동우·안경근·김의한·김홍일·이덕주·유상근·이수봉·최흥식 등이었다.
한인애국단은 일제 요인과 시설에 대한 암살과 파괴를 주요 임무로 삼았다. 한인애국단의 본부는 안공근의 집이었고, 한인애국단의 중요한 일들이 안공근의 집에서 이뤄졌다. 1931년 12월 이봉창 의사의 선서식이 안공근의 집에서 거행되었고, 단원들의 통신 연락처도 안공근의 집이었다. 윤봉길 의사가 출정에 앞서 태극기를 들고 찍은 사진은 안공근의 차남 안락생이 안공근의 집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프랑스 조계 패륵로 신천상리 20호였던 안공근의 집은 각지로 파견된 단원들이 통신 연락을 취하던 곳이었다.
특무활동에 종사한 경험이 있던 안공근은 한인애국단 사업을 총괄하는 배경이 되었다. 안공근은 1914년 형 안정근과 함께 일제의 밀정을 처단했고, 팔인단八人團을 조직해 특무공작을 벌인 바 있었다. 그는 상하이 한인들 중에서 정보력이 매우 뛰어난 편이었다. 다년간 구미영사관에 드나들며 각종의 정보를 습득했고, 밀정들에 관한 정보도 풍부했다. 일제 경찰은 “안공근은 6개 국어에 능통하고 상하이의 미국 혹은 영국 영사관에 통역으로 고용되었고, 그 후 소련 영사관으로 옮겼다가 독일 영사관에도 출입했으며, 재상하이 백계 러시아인의 조사, 보고를 하였다.”라고 파악한 바 있다. 임시정부 경무국장을 지낸 백범의 안목에서 볼 때 정보통 안공근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안공근은 상하이의 무정부주의 세력과도 친밀한 사이였다. 한인애국단이 원활한 활동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남화한인청년연맹과 같은 비밀단체의 도움이 필요했다.


©독립기념관

안공근의 집에서 찍은 윤봉길 의사 선서식


©국가유산청

안공근의 집에서 찍은 이봉창 의사 선서식

안공근은 윤봉길 의거 후 백범이 상하이를 떠나 자싱으로 피신처를 옮길 때 동행했고, 이후 자싱과 상하이를 오가며 한인애국단의 조직과 운영을 총괄했다. 일제 정보에 의하면 “윤봉길 의거 후 안공근은 김구의 재상하이 대표격”이라 지목받을 정도였다. 한인애국단에 이어 안공근은 백범의 특무조직을 운영했다. 1933년 봄 백범이 한중연대의 일환으로 기병학교 설립안을 가지고 중국의 장제스를 면담할 때 안공근, 엄항섭과 함께 동행했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의 참모였던 안공근은 학생들의 입회심사·일상생활·편의제공·지시하달·혁명학습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을 주관했다. 안공근은 한인애국단·한인특별반(한국특무대독립군)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고, 학생훈련소의 운영에 관여했다. 백범이 한국독립당과 소원해질 때에도 안공근과 엄항섭, 박찬익 등은 변함없는 동지들이었다. 안공근의 임무는 다른 조직과의 연결 문제와 재정문제였다. 백범이 미국에 보내는 편지는 엄항섭과 안공근이 영문으로 써주었으며, 백범이 장제스와 만날 때에는 안공근이 동석했다. 그는 중국국민당에서 나오는 자금을 관리했다. 여기에는 안중근 의사의 친동생이라는 후광도 작용했다고 한다. 재정문제를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주위에서 말도 많았다.
1934년 뤄양에 설립된 뤄양중앙군관학교 분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고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안경근을 비롯해 안우생, 안춘생 등 안중근 집안 출신들이 입대하면서 힘을 모았다. 한인특별반은 후일 백범의 조직적 기반을 이루었다. 백범은 1935년 1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무정부상태를 이용하여 한국국민당을 결성하면서 임시정부의 옹호를 천명했다. 이때 안공근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기보다는 특무조직을 관리하는데 힘을 쏟았다. 한국국민당은 그 전위조직으로서 한국국민당청년단과 한국청년전위단을 거느렸다. 한국국민당청년단은 1936년 7월 기존의 한국특무대독립군과 해산된 학생훈련소를 중심으로 조직한 것이다. 한국청년전위단은 광둥지역에 세력을 확대하기 위해 김구의 큰아들 김인金仁과 안공근의 장남 안우생安偶生을 파견했다. 안공근은 전위조직들을 운영하면서 각종 정보를 수집하고 한국국민당의 세력 기반을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한국국민당의 청년들이 종사한 정보공작은 완전히 안공근에 의해 움직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1939년 5월 이후 안공근은 충칭에서 홀연히 실종되었다. 실종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설이 있으나 이후 백범과의 관계도 끝나고 말았다. 안공근의 실종 이후에도 장남인 안우생은 여전히 백범을 곁에서 도왔다. 해방 후에는 백범의 대회 담당 비서로 일했다. 백범의 장남 김인과 안정근의 딸 안미생의 결혼으로 백범과 안중근 집안의 인연은 이어져 갔다.

임시정부의 선전활동을 주도한 엄항섭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자싱에서 김구, 천퉁성, 이동녕, 엄항섭

©독립기념관

한국국민당청년단의 기관지 『한청』

©독립기념관

엄항섭이 『신한민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상황 등을 전한 내용을 담은 전보(1943. 11. 5.)

©독립기념관

중국 시안에서 임시정부와 OSS 양측 수뇌부 참전 회의 후 사진. 뒷줄 왼쪽이 엄항섭 (1945. 8. 7.)

3·1운동 이후 상하이에 도착한 엄항섭嚴恒燮은 1919년 잠시 임시정부 법무부 서기로 임명되었다. 이후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의 즈장대학芝江大學 정치과에서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던 그는 1922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졸업 후 엄항섭은 프랑스 신문사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산하 경찰조직에서 형사로 7년 동안 근무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 경찰의 비밀 근무원으로 1924년 3월 1일 이후 고용되어 1931년 말까지 근무했다고 한다. 엄항섭은 프랑스 조계에서 벌어지는 한인과 관련된 사건들을 주로 담당했다. 그 수입으로 백범을 비롯한 원로 독립운동가들의 생활비를 댔다. 상하이 주재 일본 총영사관 경찰의 움직임과 관련된 정보를 입수하여 독립운동가들을 미리 피하게 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엄항섭과 백범의 연결고리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경무국장으로 활약하던 김구는 신문관·검사·판사의 역할 뿐만 아니라 형 집행까지 직접 맡았다. 프랑스의 협조와 더불어 엄항섭 또한 형사로 재직하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이를 계기로 엄항섭과 백범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엄항섭의 선전활동은 한국국민당과 재건 한국독립당, 그리고 임시정부 선전부에서 1930~40년대에 집중적으로 전개되었다. 엄항섭은 한국국민당에서 이사이자 선전부장의 역할을 맡아 기관지 『한민』을 발행했다. 산하기관인 한국국민당청년단을 조직하여 기관지 『한청』을 발행하고 청년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을 주도해 갔다. 청년 시절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청년들의 단합을 꾀했다.
선전부장직을 맡은 엄항섭은 임시정부의 활동상을 국내외에 전함으로써 임시정부의 국제적 승인을 위한 노력에 힘을 보탰다. 중국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프랑스 신문사와 프랑스 조계 공동국에서 근무한 경력을 통해 쌓아온 능통한 외국어는 선전업무에 큰 자산이 되었다. 또한 외곽단체인 한국국민당청년단의 창립을 주도했다. 한국국민당청년단은 백범의 지도와 중국의 비호 아래 조직되었던 한국독립군특무대의 후신 조직이었다. 특무대가 쇠퇴의 길을 걷자,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전위단체로서 군관학교 관계 청년 20여 명을 규합하여 1936년 7월 11일 한국국민당청년단이 조직된 것이다. 한국국민당청년단은 엄항섭의 지휘 아래 백범의 장남인 김인과 안공근의 장남인 안우생 등이 참가했다.
엄항섭은 1943년 3월 30일 주석 판공실의 주임비서로 선임되었다. 4월 10일 선전부 선전위원으로, 이듬해인 1944년 5월 8일에는 선전부장으로 선임되면서 임시정부의 선전업무를 총괄했다.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로부터 임시정부를 승인받는 것이 국제적 승인의 첫걸음이라고 판단하고 중국을 설득하는 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엄항섭의 뛰어난 언어 능력은 선전업무를 수행하는 데에 큰 도움이 됐다.
임시정부에서의 선전활동은 1940년대에 집중되었다. 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나 활동을 미주교포들에게 알리는 일을 맡아 했다. 임시정부가 해결해야 했던 주요한 과제의 하나는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중국 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다. 미주교포들의 재정적 지원을 위한 선전활동을 벌인 것이다. 1944년 인면전구 전지공작대의 활동에 감명받은 주중 미국대사관에서 ‘한국인 공작반’을 신설하자 송면수, 안병무, 안우생, 박영만과 한국인 공작반에 파견되었고 OSS와 연합작전으로 국내진공작전을 추진하는 데 공을 세웠다. 한국광복군은 OSS에서 도와주었는데 엄항섭이 이를 주선했다.
엄항섭은 광복 후 1945년 11월 3일 임시정부 환국 제1진의 한 사람으로 상하이 비행장을 출발해 김포공항에 착륙했다. 귀국 후 엄항섭은 1946년 비상국민회의 선전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임시정부에 이어 귀국해서도 엄항섭의 선전활동은 이어져 갔다. 1947년 12월 이후 백범이 남북협상으로 전환하면서 그 역시 노선을 전환, 1948년 4월 20일 남북협상에서 한국독립당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남북협상 노선을 선포한 뒤 임시정부 인사들이 백범 곁을 떠날 때에도 엄항섭은 끝까지 백범의 노선을 따랐다. 그리고 1949년 백범의 서거라는 큰 슬픔을 겪은 후, 1950년 6·25전쟁 중에 납북되어 평양에서 1962년 7월 30일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