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온 소식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육정책과 인성학교
-『독립신문』 기사를 중심으로-
— 글. 김광재(전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우리 국민이 단정실행할 육대사」, 『독립신문』 제35호(1920. 1. 8.)
임시정부의 교육정책
1919년 4월 중국 상하이에서 3·1운동으로 나타난 독립국가·민주공화국가 수립의 민족적 의지를 수렴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는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에서 국민의 의무를 규정하면서 교육·납세·병역의 3대 의무를 천명했고, 이어서 같은 해 9월 11일 임시헌법을 공포하면서 보통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의무를 규정했다. 계속하여 시정방침을 발표하여 국정교과서의 발행, 각지에 학교 설립 장려 및 의무교육제 실시를 천명했다.
임시정부의 교육에 대한 이념은 ‘우리 국민國民이 단정斷定코 실행實行할 육대사六大事’(군사·외교·교육·사법·재정·통일)라는 안창호의 1920년 벽두 연설에서 잘 나타나 있다. 독립신문에 소개된 연설은 교육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독립운동기간獨立運動期間에 우리는 교육敎育을 힘쓰미 맛당할가요 나는 단언斷言하오 독립운동기간獨立運動期間일사록 더 교육敎育에 힘써야 한다고 ...... 독립獨立을 위爲하야 공부工夫를 게을니 아니하면 이야말로 독립獨立의 정신精神을 일치 아니하오 국가國家를 위爲하야 독립獨立을 위爲하야 시간時間 잇는 대로 힘써 공부工夫하시오 또 국민國民에게 조흔 지식知識과 사상思想을 주고 애국愛國의 정신精神을 격발激發하기 위爲하야 조흔 서적書籍을 만히 간행刊行하야 이 시기時機에 적합適合한 특수特殊한 교육敎育도 하여야 하고 학교學校도 세우고 교과서敎科書도 편찬編纂하야 해외海外에 재在한 아동兒童에게도 가급적可及的 교육敎育을 시施하여야 하오
- 『독립신문』 제35호(1920. 1. 8.) -
임시정부의 교육 이념과 정책은 상하이에 이미 설립된 인성학교를 통해 구현되었다. 임시정부 산하 교민단을 통해 인성학교를 공립화하여 초등교육기관으로 운영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산하 대한교민단이 관리하는 학교가 되면서 공립학교로 바뀌었다.
인성학교의 운영
인성학교의 교육목표나 내용은 민족교육을 통해 민족정신과 민족역량을 배양하고 자활능력을 양성하여 완전한 민주시민 육성과 신민주국가를 건설하는데 있었다. ‘덕지체’의 삼육을 바탕으로 건전한 육체와 인격을 갖춘 인재 양성을 중시했다. 여기에 더하여 인성학교는 학생들에게 투철한 ‘한국혼’을 주입하여 장차 독립운동인재로 양성하고자 했다. 그래서 한글, 한국의 역사와 지리 등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과목을 위주로 했다.
인성학교의 교장을 비롯한 교원들은 임시정부와 관계있는 독립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선우혁, 손정도, 여운형, 김태연, 김두봉 등이 교장으로 역임했다. 일반 교사들도 임시정부나 교민단의 간부들이었다. 학생 수는 임시정부가 수립된 다음 해인 1920년도 신학기에는 학급수가 4개로 늘어나고 유치원급이 증설되면서 학생 수는 30명으로 늘어났다. 1920년대 후반 이후에는 매년 50~70명 선의 학생 수를 유지했다. 1920년 인성학교의 현황에 대해 독립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인성학교상황仁成學校狀況」, 『독립신문』 제58호(1920. 3. 25.)
작년昨年에 제일회필업식第一回畢業式을 거행擧行한 상해한인인성학교上海韓人仁成學校는 거류민단居留民團의 사업事業으로 현의정원의장現議政院議長 손정도씨孫貞道氏를 교장校長으로 하야 발전發展을 계획중計劃中인대 거월去月에는 소년극少年劇을 북경로십팔호北京路十八號에 개최開催하야 호성적好成績을 득得하고 기구器具 기타其他의 설비設備는 착착진행중着着進行中으로 전도前途가 괄목括目할 만하다 금년今年 신학기新學期에는 아령급중령俄領及中領으로붓터 고안중근씨故安重根氏의 자질子姪과 권진오씨權振五氏의 자제子弟 또 학무총장學務總長 김규식씨金奎植氏의 자제子弟가 동교同校에 입入하야 면학중勉學中이라
해교該校의 현황現况을 문聞컨대 현재現在 학급學級은 사四이오 유치급幼稚級을 특설特設하엿고 학생수學生數는 삼십三十이라 학교學科는 국어國語, 국사國史, 본국지리本國地理, 한문漢文, 산술算術, 이과理科, 수공외手工外에 삼사년급三四年級에는 영어英語를 가加하다. 직원職員으로는 손교장孫校長 이하以下에 학감學監 김태연金泰淵, 남교원男敎員 윤종식尹宗植, 여교원女敎員 정애경鄭愛敬, 김연실金蓮實 제씨諸氏인대 대학大學 혹或은 중학출신中學出身이오 다년多年 교육敎育에 경험經驗이 잇는 이들이라. 당사자當事者는 특特히 아중양령俄中兩領에 재在한 자제중子弟中에 입학자入學者 만키를 바란다 한다
- 『독립신문』 제58호(1920. 3. 25.) -
인성학교는 일년에 한 번씩 졸업생들을 배출했다. 졸업식에 즈음해 교장은 교민사회 각계에 초청장을 발송하여 졸업식에 초청했다. 졸업식은 삼일당三一堂 등 프랑스 조계에 있던 교회당을 빌려 거행했다. 이때는 학부형 교민들이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인성학교졸업식仁成學校卒業式」, 『독립신문』 제162호(1923. 7. 21.)
상해上海에 재在한 아인성학교我仁成學校애서는 금년今年 제사회第四回의 졸업식卒業式과 진급식進級式을 지난 구일九日 하오두시下午二時 동지삼일당同地三一堂에서 거행擧行하엿는대 교장校長 도인권씨都寅權氏의 사회司會로 졸업증서卒業證書, 진급증서進級證書, 성근증서급상품誠勤證書及賞品의 수여授與가 잇고 학교직원學校職員의 학사보고學事報告와 내빈중來賓中 이청천李靑天, 김창환金昌煥 양씨兩氏의 축사祝辭가 잇고 폐식閉式하엿은대 졸업생卒業生의 성명姓名은 좌左와 여如하더라 현보라玄保羅一三 정흥순鄭興淳一三 김영애金永愛一三 옥인섭玉仁燮一二
- 『독립신문』 제162호(1923. 7. 21.) -
인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은 현지의 상급학교에 진학했으며, 후일 독립운동가, 교육자, 예술가, 상인 등 상하이 한인사회와 광복 후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인성학교는 진급식도 성대하게 거행했다. 1924년 2월 16일 오후 2시 인성학교는 삼일당에서 진급식을 거행했다. “무궁화”의 애국가로 시작한 진급식은 교장 이유필의 개회사에 이어 진급 증서와 상품 수여가 있었다. 내빈 가운데 김갑金甲의 축사가 있었고 진급생의 답사가 있은 후에 식을 마쳤다. 식이 끝난 후에는 계속하여 학무위원 김두봉, 여운형 등의 학생 모집과 학교교사 건축 문제에 대한 연설이 있었고 학생들의 여흥이 있은 후에 헤어졌다.(『독립신문』 제 172호, 1924년 3월 1일)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인성학교학예회仁成學校學藝會」, 『독립신문』 제103호(1921. 4. 21.)
인성학교의 학생 활동
인성학교의 교육은 교실 안의 정규적인 교과수업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인성학교 학생들은 연습회, 학예회, 연주회, 가극대회, 운동회 등 다채로운 활동을 통해 ‘덕지체’를 함양했다. 학예회의 모습은 독립신문에 생생하게 소개되고 있다. 1921년 4월 9일 오후 7시부터 프랑스조계 한인예배당 삼일당에서 인성학교 학예회가 열렸다.
천진난만天眞爛滿한 어엽분 그의 태도態度 반점半點의 꿈임업는 각종各種의 연예演藝만상萬象이 방창方暢한 금사월구일今四月九日 하오칠시下午七時에 삼일리三一里 삼일당三一堂에서는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제이회학예회第二回學藝會가 만장滿場의 환희歡喜 속에서 열니엿다. ..... 어린 학생學生의 개회사開會辭가 잇슨 후後 순서順序에 따라 어린 연자演者들이 차제次第로 단壇에 나왓다. .... 또한 현피득군玄彼得君의 「임진난壬辰亂의 압흠」이란 문제問題를 걸고 당시當時의 통탄痛歎한 사정事情과 현금現今의 비절悲絶한 정황情况을 설파說罷함에는 듯는 자者로 하여곰 감루感淚를 먹음지 안을 수 업섯스며 다음에 한태학군韓泰學君의 차서次序에 입入하야 「조상祖上 나라를 위爲하야 무엇을 할가」 하는 문제問題로 교육敎育의 필요必要를 절대제창絶對提倡하며 「여러 부모父母님네여 우리 어린 아해兒孩를 가르쳐주소셔 우리는 정력精力을 다하야 공부工夫하여서 정치가政治家, 이학가理學家, 종교가宗敎家, 항공가航空家, 항해가航海家, 예술가藝術家 무엇이던지 우리 민족民族의 요구要求하는 대로 되겟슴니다 갈아쳐 주소서」라고 부르짓는 그의 소래 먹는 어린 아해兒孩 어머니에게 젓을 봇채는 늣김이 잇섯다 실實로 우리 민족民族의 사활문제死活問題인 이 가장 귀貴하고 중重한 교육敎育을 자제子弟의게 맛당히 구求키 전前에 줄 교육敎育을 이러케 부르지짐과 봇챔을 밧은 부모父母들은 무엇으로써 그 어린 그네를 달내며 깃브오게 하리 .....
- 『독립신문』 제103호(1921. 4. 21.) -
학예회 식장에는 만국기가 휘날리고 벽에는 태극기가 높이 걸렸다. 일동은 기립하여 애국가를 합창했다. 그 다음 어린 학생의 개회사가 있은 후 순서에 따라 행사가 진행되었다. 이날 학예회는 학생들의 감동적인 연설이 이어지면서 절정에 달했다.
특히 두 번째 연사로 나선 한태학韓泰學 학생이 ‘조상나라를 위하야 무엇을 할까’라는 주제로 교육의 필요성을 고창하는 연설을 했다. 한태학 학생은 “여러 부모父母님네여 우리 어린 아해兒孩를 가르쳐주소셔 우리는 정력精力을 다하야 공부工夫하여서 ..... 무엇이던지 우리 민족民族의 요구要求하는 대로 되겟슴니다”라고 절규했다.
이에 대해 독립신문은 이 연설이 젖먹는 아이가 엄마의 젖을 보채는 느낌이 있다고 감상을 피력했다. 나아가 민족의 사활이 걸린 교육에 대해 어른들이 먼저 자녀들에게 어떻게 교육을 할 것인가 고민할 것을 주문했다.
인성학교 학생들은 삼일절 기념행사 등 임시정부 및 교민사회의 각종 행사나 집회에 참여했다. 인성학교 학생들은 삼일절 등 민족적인 경축일을 기념하는 공연도 벌였다. 1924년 3월 1일 저녁에는 삼일절을 기념하는 사극을 공연했다(『독립신문』 제 172호, 1924년 3월 1일). 1926년에는 “오누이”라는 제목의 연극을 공연하기도 했다. 내용은 아버지가 일제에 체포되고 어머니가 살해되는 바람에 의지할 데가 없는 고아가 된 오누이의 비참한 삶을 그린 이야기였다. 오누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옥에서 보내온 아버지의 편지를 읽는 모습은 ‘관중들의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불러일으켰다.
3월 1일 교민단 주최로 삼일절 기념식이 성대하게 열린 것과는 별도로 인성학교도 삼일절 축하회를 개최했다. 1922년 3월 3일 삼일당에서 열린 삼일절 축하회가 끝난 다음 학생들은 가상의 호외를 뿌렸다. 호외의 내용은 독립군이 만주 안동현에서 압록강을 건너 일본군을 공격하고 다시 부산까지 추격하여 일본으로 퇴각시키고는 서울로 돌아오니, 휴전을 요구하는 일본 천황의 전보가 전달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매년 삼일절 기념식 후에는 독립군과 일본군이 교전하여 일본군이 패망하고 독립군이 서울로 개선한다는 내용의 연극을 공연했다. 이러한 공연을 통해 학생들은 민족의식을 길렀으며 교민들은 민족적 울분을 해소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