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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함께 세운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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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세운 공화국

- 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제와 연대의 길 -

— 글. 김정인(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민주공화국을 향한 역사

ⓒ국립중앙도서관

대한국국제(1899)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은 순종 황제의 어새가 찍힌 한일병합조약으로 사라졌다. 중국의 지식인 량치차오는 “모든 책임은 궁정에 있다”라며 황제 한 사람이 곧 주권인 전제군주제 국가였기에 대한제국이 멸망했다고 개탄했다. 그런데 대한제국 국민에게도 국민주권을 실현할 기회가 있었다. 조선 말기인 1857년에 최한기는 『지구전요』에서 영국의 입헌군주제를 소개했다. 갑신정변의 급진개화파와 갑오개혁정부의 개화파 관료들은 왕의 명령이라도 내각의 의결을 거쳐 시행하도록 하는 합의제 정치를 시도했다. 1898년 독립협회의 의회개설운동은 그 흐름의 정점이었다. 그러나 고종은 ‘민권이 번성하면 군주권이 약해진다’는 논리로 독립협회를 강제 해산했고 이듬해인 1899년에 「대한국국제」를 반포해 대한제국이 황제가 무한한 권력을 갖는 전제군주국임을 국내외에 천명했다. 일본은 1889년에 「대일본제국헌법」을 반포하며 입헌군주제 국가로 나아갔고 청은 황제가 1906년에 입헌군주제로의 개혁을 약속했으나 대한제국 황제는 끝내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거부해 국민은 일본의 식민지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국민은 비록 나라를 잃고 망국민의 처지가 되었지만 좌절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왕이 없는 나라’, 곧 왕이 아니라 국민이 주인인 민주의 나라, 왕의 전제주의가 사라진 공화주의의 나라를 꿈꾸기 시작했다. 1910년 전제군주국 대한제국이 멸망한 데 이어 1911년 신해혁명으로 황제의 나라 청이 무너지고 공화정의 중화민국이 들어섰다. 1917년에는 러시아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졌다. 국민은 이러한 변화를 정확히 읽어내며 국민주권의 독립 국가를 구상했다.
해외의 한인들이 먼저 움직였다. 미국의 대한인국민회는 한일병합조약 체결 직전부터 ‘우리 손으로 임시정부를 세우자’라고 외쳤고, 연해주의 권업회는 1914년 공화제에 기반한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1917년 박은식·신채호·조소앙 등 14명이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1910년 황제가 주권을 포기한 그날, 그 주권은 국민에게 넘어왔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이제 민주공화국은 돌이킬 수 없는 꿈이 되었다.

단 열 개의 조항에 담은 새 나라

ⓒ독립기념관

대동단결선언문(1917)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대한민국 임시헌장(1919. 4.)

1919년 3월 1일, 한반도에서 독립을 외치는 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빈부와 귀천, 남녀를 가리지 않고 거리로 나선 사람들은 단지 일본을 몰아내자고만 외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되찾으려 한 것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 곧 자유와 평등이었다. 전국에 뿌려진 임시정부 선언서들이 한결같이 공화제를 내걸었다는 사실은 이제 그 꿈이 온 민족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3·1운동은 ‘우리도 나라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모두의 가슴에 새겼다.
3·1운동의 열기 속에 1919년 4월 10일 밤,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은 임시의정원이라는 의회를 먼저 구성했다. 그리고 밤을 새우며 헌법을 만들고, 다음날인 4월 11일에는 그 헌법 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즉 해방 이후 1948년에 제헌의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만들고 그 위에 대한민국을 세운 것처럼, 1919년에도 독립운동가들은 의회를 먼저 세우고 헌법을 만들고 정부를 세우는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임시정부를 만들었다. 나라 이름도 ‘황제가 아니라 국민이 주인’이라는 뜻에서 대한민국으로 정했다.
단 열 개의 조항으로 이루어진 임시헌장의 첫머리인 제1조는 이렇게 시작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이어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제3조), “대한민국 인민은 종교, 언론, 저작, 출판, 결사, 집회, 통신, 주소 이전, 신체 및 소유의 자유 등을 향유한다”(제4조), “대한민국 인민으로 공민 자격이 있는 자는 선거권 및 피선거권을 가진다(제5조)” 등의 조항이 뒤따랐다. 제3조와 제5조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시헌장은 남성은 물론 여성에게도 참정권을 인정했다. 뒤이어 발표된 「임시의정원법」은 중등교육을 받은 만 23세 이상의 남녀가 피선거권을 가진다고 못 박았다. 당시는 아직 10여 개국에서만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했던 시절이었다. 사형과 고문을 없애고 공창제를 폐지한다는 인권 관련 조항(제9조)까지 담은 이 임시헌장은 비록 10개 조항에 불과했지만 민주 국가가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약속을 간결하게 응축하고 있었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대한민국임시정부성립축하문(1919. 10. 31.)

흥미로운 점은 민주공화제라는 말에 대해 누구도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임시헌장을 기초한 조소앙도 그것을 통과시킨 임시의정원도 이 말을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만큼 ‘왕 없는 나라, 국민이 주인인 나라’라는 생각이 이미 사람들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안창호는 1920년 1월 초 임시정부의 신년 축하회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과거에 황제는 한 사람뿐이었지만, 지금은 이천만 국민이 모두 황제요. 황제란 무엇이오. 주권자를 이름이니 과거의 주권자는 오직 한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제군이 다 주권자외다”


주권이 한 사람에서 모두에게로 옮겨 왔음을 이보다 확실히 표현한 말은 없을 것이다. 그 정신은 이후 임시정부에서 다섯 차례의 개헌이 있었지만 ‘대한민국의 주권은 인민 전체에 있다’라는 원칙으로 흔들림이 없이 이어졌다.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신년축하식 기념사진(1921. 1. 1.)

혼자서는 세울 수 없는 나라 — 연대의 전통

ⓒ독립기념관

김구 서명문 태극기

새 나라의 설계도가 아무리 훌륭해도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일은 한 사람의 힘으로는 불가능했다. 임시정부의 역사는 곧 연대의 역사였다. 먼저 3·1운동 자체가 그러했다. 처음에는 종교계가 각각 따로 독립선언을 준비했다. 그러나 천도교, 기독교, 불교계 지도자들이 곧 손을 잡았고 여기에 학생 세력이 가담하면서 비로소 온 민족이 함께 외치는 만세가 가능해졌다. 종교가 다르고 노선이 달라도 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 앞에서 그들은 기꺼이 연대했다.
임시정부의 출범 자체도 연대의 산물이었다. 3·1운동을 전후해 상하이, 연해주, 국내 한성에서 각각 임시정부가 세워졌으나, 안창호 등의 노력으로 1919년 9월 하나의 통합 임시정부가 탄생했다. 흩어진 세 정부가 하나로 모인 이 통합이야말로 노선과 지역을 넘어선 연대의 소중한 결실이었다.
이 연대의 전통은 3·1운동 이후 한국인 사이에 확실히 뿌리내렸다. 1923년 전라남도의 작은 섬 암태도에서 소작인들이 지주의 과도한 소작료에 맞서 일어섰을 때 처음에는 섬 하나의 고립된 싸움처럼 보였다. 그러나 소식이 신문을 타고 퍼지자 서울의 노동·청년 단체가 조사위원을 보내고, 평양의 사회단체가 성금을 모으고 멀리 일본 오사카에서까지 쟁의 기금이 답지했다. 변호사들은 무료 변론을 자청했다. 섬 하나의 싸움이 전국과 해외의 응원 속에서 끝내 소작료 인하라는 승리로 끝난 이 사건은 식민권력 앞에서 약자였던 한국인들이 서로 손잡을 때 비로소 강해진다는 것을 보여 준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연대는 이념의 차이마저 넘어섰다. 임시정부는 초기에 외교론과 독립전쟁론, 준비론과 개전론 사이에서 치열하게 갈등했다. 어떤 길로 독립을 이룰 것인가를 두고 뜨거운 논쟁이 오갔다. 그러나 이러한 갈등은 분열로 끝나지 않았다. 해방이 가까워질수록 연대의 폭은 오히려 더 넓어졌다. 임시정부는 좌익 세력인 조선민족혁명당까지 받아들여 좌우합작의 통일 정부로 거듭났다. 중국 화북지역의 조선독립동맹, 국내에서 비밀리에 조직된 조선건국동맹과도 손을 잡으려 했다. 임시정부가 옌안의 조선독립동맹에 편지를 보내 ‘함께 통일하자’고 제안하고 조선건국동맹이 옌안과 임시정부가 있는 충칭을 오가며 연락을 시도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비록 갑작스러운 해방으로 이 통합은 완성되지 못했지만 노선과 이념이 달라도 일본을 몰아내고 새 나라를 세운다는 큰 목표 앞에서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모두를 움직이고 있었다.
해방 직전 독립운동세력 간의 활발한 연대를 이끈 임시정부의 주석은 김구였다. 그는 일찍이 1931년에 한인애국단의 이봉창과 윤봉길의 의거를 기획하고 실행함으로써 침체에 빠진 임시정부에 숨을 불어넣었고 무너져 가던 중국과의 연대를 되살리는 결정적 계기를 만든 바 있었다.

100년 전의 꿈, 오늘의 우리

1919년의 임시헌장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선언은 다섯 차례의 개헌을 거치며 단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1948년 제헌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로, 다시 오늘 우리가 외우는 헌법 제1조 1항으로 그대로 이어졌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지금의 헌법 제1조 2항 역시 1919년 통합 임시정부 헌법이 처음 새긴 “주권은 인민 전체에 있다”는 조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2026년은 백범 김구가 태어난 지 150년이 되는 해이다. 우리는 김구라는 이름을 통해 식민지라는 절망의 시대에 한국인이 무엇을 꿈꾸었고, 그 꿈을 어떤 방식으로 함께 세워나갔는지를 다시 떠올리게 된다. 황제의 나라를 국민의 나라로 바꾸어 낸 공화주의의 상상력, 그리고 종교와 이념과 국경을 넘어 손잡았던 연대의 힘. 김구와 임시정부 지도자들이 함께 빚은 그 꿈은 지금도 우리가 살아가는 대한민국의 뿌리 깊은 토대로 작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