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메뉴버튼 퀵메뉴버튼 최상단으로 가기

특집

임시정부의 문화와 교육

특집

임시정부의 문화와 교육

– 김구가 꿈꾼 아름다운 한국 -

— 글. 허재영(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육학과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문화와 교육정책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민국 임시관제」, 『독립신문』 제30호(1919. 11. 27.)

김두봉의 『깁더 조선말본』

“우리 대한 인민은 우리나라가 독립국임과 우리 민족이 자유민임을 선언하였도다. 이로써 세계 모든 나라에 알려 인류 평등의 대의를 지극히 밝혔으며, 이로써 자손만대에 깨우쳐 민족자존의 바른 권리를 영원히 갖게 하였도다.”

- 「대한민국 임시헌법」, 『독립신문』 제9호(1919. 9. 16.) -

1919년 4월 11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租界에서 3·1 독립투쟁 직후 망명한 독립투사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10개 조의 임시헌장을 반포했다. 4월 17일 관제를 공포한 임시정부에서는 여러 차례 회의를 거쳐 9월 11일 임시정부의 ‘신헌법新憲法’을 발포했다. 위의 인용문은 이때 공포된 헌법 전문의 일부이다. 이 헌법은 내용으로 볼 때, ‘기미독립선언서’를 기반으로 한 민족자존의 독립 국가임을 세계 모든 나라에 천명하는 일로부터, 인민 주권의 민주국가, 문화 발전의 자주 국가를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
임시정부의 관제가 공포된 것은 1919년 11월 5일로 법률 제2호 ‘임시관제’에 따르면 ‘임시정부 대통령 직할 기관’으로 ‘대본영, 참모부, 군사 참의회, 회계원 검사檢査’가 있었고, ‘국무원 소관’으로 ‘국무원, 서무국, 법제국, 전계국銓稽局’이 있었으며, ‘각 부各部’에 ‘내무부, 외무부, 군무부, 법무부, 학무부, 교통부, 노동부’가 있었다. 비록 망명 정부일지라도 독립 국가로서의 체계적인 정부 조직을 만들고자 힘썼음을 보여주는 셈이다. 그 가운데 ‘학무부’와 관련한 규정은 “교육·학예와 관한 일체의 사무를 통괄함”(제1조)을 목적으로, “비서祕書, 교육敎育, 편집編輯”(제2조)의 3개국局을 두도록 했다. ‘비서국’은 “학교 직원, 건축 영선營繕, 고등교육회의高等敎育會議, 학교위생, 박람회 및 포상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며(제3조), ‘교육국’은 “일반 학교에 관한 사항, 해외 유학생에 관한 사항, 도서관·박물관·천문대 및 측후소에 관한 사항, 의술 개업 및 약제사 시험에 관한 사항, 산업교육비 국비 보조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고(제4조), ‘편집국’은 “교과용 도서의 편찬 발행·조사·검정·인가, 교육상 필요한 도서 편찬 및 번역, 국어國語 조사 및 도서 관리” 등과 관련된 사항(제5조)을 담당하도록 했다.1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학무부장은 김규식이었다. 그는 한성 관립영어학교를 졸업하고 파리강화회의 민족 대표위원으로 파견되었으며, 임정 초대 부주석을 지낸 분으로 9개 국어에 능통한 엘리트였으나, 임정의 문화와 교육 문제와 관련한 정책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임시정부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백범일지』에서 김구가 “내가 맡은 경무국의 임무는 기성 국가에서 하는 보통 경찰 행정의 하나요, 왜(일본)의 정탐 활동을 방지하고 독립운동가가 왜에 투항하는 것을 감시하며, 왜의 마수가 어느 방면으로 들어오는가를 감시하는 데 있다.”라고 했듯이, 학무부 업무를 맡았을지라도 임정에서 김규식의 역할이 교육과 문화 문제만을 전담하는 데 그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위의 학무국 업무에서 확인되듯이, 임시정부 교육·문화정책에는 ‘국어 조사’, ‘도서 관리’ 등과 같이 뚜렷한 지향점이 드러난다. 온갖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1940년 3월 공포한 ‘건국강령建國綱領’ 제1장에서 “우리나라는 우리 민족이 반만년 이래로 공통한 말과 글과 국토와 주권과 경제와 문화를 가지고, 공통한 민족정기를 길러온 우리끼리로써 형성하고 단결한 고정적 집단의 최고 조직임.”2이라고 천명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이처럼 민족정기를 살리는 ‘우리 말과 글’을 중시하고, 세계 평화와 문화 민족임을 강조한 데에는 임시정부에 참여한 독립투사들의 의지가 집약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1924년 임시의정원 의원이자 인성학교 교장을 맡았던 김두봉이나 1920년 2월 서거한 국어학자 이규영과 같은 분들은, 일제강점기 모국에서 빼앗긴 우리 말과 글을 되찾는 것이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로 여겼던 분들이었다. 상하이 『독립신문』에 빈번히 실렸던 김두봉의 『깁더 조선말본』 광고나 김병조가 편집한 『대한독립운동사』, ‘사료 모집 광고’ 등은 임시정부 교육·문화정책의 지향점을 잘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1 『독립신문』 제30호(1919. 11. 27.) , 『독립신문』 제31호(1919. 12. 2.) 참고

2 『한국독립운동사』, 애국동지후원회(1956) 349쪽

상하이 『독립신문』을 통해 본 문화와 교육 투쟁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아령실기」, 『독립신문』 제58호(1920. 3. 25.)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독립신문』 제78호에 실린 「의병전」 원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인성학교 학생과 교사들

임시정부의 교육·문화정책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음에도 상하이 『독립신문』에는 백절불굴의 교육 투쟁이 곳곳에 나타난다. 그 중 대표적인 것으로 인성학교仁成學校를 살펴볼 수 있다. 이 학교는 개교 시점(1917년 상하이 한인기독교소학교를 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음)과 폐교 상황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임시정부 설립 초기부터 국내에서도 상하이 유일의 동포 학교이자 독립운동 단체로 알려져 있었다. 이는 『조선일보』 1923년 2월 8일 ‘독립기관의 각 단체’에 이 학교 이름이 포함되어 있고, 상하이에서 조직된 ‘후원회’에 대한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 설립 당시 이 학교는 중국 내 사립학교로 출발했으나 1923년 말 공립 보습과를 설치하고, 그 학교 졸업자와 본국에서 온 학생 가운데 중국 학교에 입학하기 어려운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민족교육을 실시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상하이 『독립신문』 1921년 4월 21일 ‘인성학교 학예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개회사와 애국가, 어린 학생들의 노래와 애국성을 담은 연설로 이루어진 이 학예회에 대해, 기자는 “조국의 강산을 구경치도 못하였고, 조국의 수토水土를 맛보지도 못한 그 어린아이들이 조국을 구가歐歌하고 조국을 애모하는 그 얼굴과 음성을 보고 들을 때마다 고국의 기름진 판도版圖와 신성한 역사를 적의 유린에 맡기고, 헐벗은 몸 빈손으로 동서에 표박漂迫하고 남북에 부르짖게 된 어른들로 하여금 셀 수 없는 눈물과 한숨을 내게 하고 수치와 통탄을 발發케 하였다.”라고 적어 놓았다.
임시정부에서 직접 실행한 것은 아니지만, 상하이 『독립신문』에는 일제강점기 중국과 러시아에 망명했던 독립투사들의 험난한 교육 투쟁사가 빈번히 나타난다. 그중 하나로 ‘뒤바보’라는 필명을 사용했던 계봉우의 ‘아령실기俄領實記’가 있다. 그는 간혹 ‘사방자四方子’라는 필명으로 해외 사정과 역사에 관한 글을 쓰기도 했는데, 『조선역사』(1912), 『의병전』(1920), 『동학당 폭동』(1932) 등의 역사서뿐만 아니라 1937년 강채정과 함께 『고려어 교과서』를 편찬할 정도로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다. ‘아령실기’는 1920년 2월 26일 상하이 『독립신문』 제48호부터 4월 8일 제62호까지 13회에 걸쳐 연재된 러시아 지역 동포들의 역사를 요약한 것으로, ‘러시아 이주 원인, 풍속, 노동, 사환仕宦, 사회(주로 단체), 종교, 교육, 독립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운데 ‘교육’에서는 그 당시까지 한인들이 “생계 상의 타격으로 그 곤란을 면하기 위해, 정치상 가혹으로 그 압박을 피하기 위해, 또는 왜구의 횡포로 그 구속을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에 이주한 것이므로, 경제적 곤란과 이민족 흡수 정책을 반영한 러시아의 교육 제도 등이 민족교육을 어렵게 하는 중대한 요인으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상황에서도 러시아 동포들은 ‘청년교육회, 권업회, 전 러시아 한족회’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동포 교육을 진행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정교보正敎報』, 『청구보靑丘報』, 『한인보』 등의 신문과 『자유종』이라는 잡지와 같은 매체 발행도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였다.
현재 이들 신문·잡지 가운데 일부가 발굴되어 연구자들이 활용할 경우가 있으나, 사실 이 기사에 등장하는 다수의 저서나 매체에 관한 실태 조사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서 처절했던 동포들의 민족 교육사 연구를 위한 기초 작업이 더 절실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령실기’ 이외에 상하이 『독립신문』에 등장하는 ‘화동 유학생회華東留學生會’(1922. 7. 15. 제133호), 박종근朴宗根이 쓴 ‘시베리아 한인교육西伯利亞 韓人敎育’(1923. 1. 10. 제151호) 등에 기록된 사실들은 좀 더 주목하여 추적·연구해야 할 것이다.

김구가 꿈꾼 아름다운 한국

 

ⓒ독립기념관

백범 김구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 『백범일지』 하권, ‘내가 원하는 나라’ -

백범은 ‘나의 소원’에서 ‘내가 원하는 나라’는 ‘아름다운 나라’라고 했다. 그가 말한 아름다운 나라는 남의 침략을 받거나 남을 침략하는 나라가 아닌 자주독립 국가이다. 백범은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는 나라”,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실현되는 나라, 홍익인간이라는 국조 단군의 이상이 실현되는 나라를 원한다고 거듭거듭 말한다. 백범은 “이 일을 하기 위하여 우리가 할 일은 사상의 자유를 확보하는 정치 양식의 확립과 국민 교육의 완비”라고 했다. 임시정부의 활동은 백범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의 피맺힌 역사를 증명하며, 온전히 전해지는 것은 아니지만 현전하는 상하이 『독립신문』은 한국의 역사와 문화, 광복을 준비하던 임시정부의 교육 사상을 이해하는 귀중한 자료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나의 소원’은 광복 이후 덧붙인 글이다. 안타깝게도 백범은 ‘아름다운 나라’, ‘자주독립 국가, 문화국가’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백범의 꿈은 현재까지 실현되지 못한 면이 적지 않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뿐만 아니라 8·15가 ‘해방이냐’, ‘광복이냐’에 대한 합일점을 찾은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피 맺힌 임시정부의 교육과 문화 활동이 더없이 소중할 수밖에 없다.

- 메인 사진 : 상하이 인성학교 휴교 시 사진(1935. 11. 11.) ⓒ독립기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