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의열투쟁과 무장투쟁
— 글. 김용진(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
올해 2026년은 유네스코UNESCO가 백범 김구 탄생 150주년을 맞이해서 기념일로 지정한 뜻깊은 해이다. 백범 김구는 살아생전에 회고록을 남겨서, 자신이 살아온 이력과 독립운동 활동, 광복 이후 건립하게 될 국가의 미래에 대해서 소회를 밝혔다. 특히 그가 남긴 「나의 소원」은 현시점에서 읽어보아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중략)…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서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이 글은 백범이 회고록으로 남긴 『백범일지』의 끝부분에 첨부되어 있는 「나의 소원」 가운데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여기서 백범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소망하면서, 이를 위한 첫 번째 과제로 한없이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지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국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만 갖춘다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21세기 현재 대한민국은 백범이 꿈꾸었던 아름다운 나라가 되어가고 있다. BTS를 비롯한 K-팝과 K-푸드, K-드라마, K-화장품 등 다양한 K-콘텐츠와 한국 문화들은 ‘KOREA’의 첫 글자 K자를 따서 전 세계로 퍼져나가 세계인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하고 있다. 이제 K-문화는 전 세계의 기준이자 모범이 되었다. 이것은 김구가 일전에 「나의 소원」을 통해서 밝힌 것으로, 지금으로부터 약 한 세기 만에 그의 소원이 현실화한 것이다. 만약 백범이 이러한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하늘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자랑스러워하고 계실 것이다.
(1) 1920년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 선포와 군사 정책
ⓒ국사편찬위원회
일본 외무성기록 중 「대한민국육군임시군구제」(1919. 12. 18.)
백범은 우리의 국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 정도만 된다면 좋다고 보았다. 그랬기에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해서 우리의 주권을 스스로 지킬 수 있는 독립운동 투쟁방략을 모색하는 데 많은 고심을 해왔다. 이러한 투쟁방략 가운데 자신의 주권을 지키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자 표현으로 항일무장투쟁이 제기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방략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었다. 실력양성론(준비론)과 외교독립운동론 그리고 항일무장투쟁이 그것이다. 임정은 설립 초기에 국제정세를 활용한 외교독립운동에 방점을 두고 광복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이것은 임시정부가 자리한 중국의 상하이上海가 국제적인 도시인 점을 고려하여, 세계인들을 상대로 외교 교섭을 통해서 미·일 전쟁과 일·소 전쟁 등을 야기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외교론에만 치중한 것은 아니었다. 설립 초기 임정의 외교독립운동은 향후 일본과의 독립전쟁 개전에 대비해서 현 국제정세를 우리에게 유리하도록 조성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즉, 임정은 대미·대중·대소와의 외교 교섭을 통해서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불러일으키고, 그에 따라 일본이 국제사회로부터 고립되었을 때를 기회로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개시하고자 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설립된 당시부터 독립투쟁 방략으로서 항일무장투쟁을 견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징적인 표현이 1920년 1월 1일 신년을 맞아서 ‘독립전쟁의 해’ 선포로 이어졌다.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이라는 대내외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다양한 독립투쟁의 방략을 모색하고자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항일무장투쟁과 준비론, 외교론 등으로 나타났다.
임시정부가 선포한 ‘독립전쟁’은 대 전략론으로서의 독립전쟁론에 따라 항일무장투쟁·외교독립운동·실력양성운동 등이 일제강점기 전 시기에 걸쳐서 활발하게 전개된 것을 총칭한다. 이와 같은 독립운동 방략들은 개별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제와의 독립전쟁 개시를 최대 목표로 상정하고서, 톱니바퀴가 맞물려 나가듯이 상호작용에 의해서 추진해 나갔던 것이다.
임시정부는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서는 항일무장투쟁만이 해답임을 깨달았다. 이러한 임정의 독립전쟁 구상을 구체적으로 잘 보여주는 것이 1919년 12월 18일자로 발표된 「대한민국 육군임시군제大韓民國 陸軍臨時軍制」, 「대한민국 육군임시군구제大韓民國 陸軍臨時軍區制」, 「임시육군무관학교조례臨時陸軍武官學校條例」 등이었다. 「육군임시군제」는 임시정부의 기본적인 군사 정책과 군사 계획에 관한 기본 골격을 이루는 것으로, 향후 1940년에 창설하게 될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모태가 되었다. 이와 함께 「임시군구제」와 「육군무관학교조례」 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병력을 모집하고 군사간부를 양성하기 위한 방법을 규정했다.
특히 임시정부는 「육군무관학교조례」를 통하여 상하이에 육군무관학교를 설치하고 육군 간부를 양성하려고 했다면, 미국의 캘리포니아주에는 비행사양성소飛行士養成所를 설립하여 공군 장교 양성에 노력을 기울였다. 비행사양성소는 당시 임시정부 군무총장인 노백린盧伯麟이 미주동포 실업가 김종림金宗林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설립한 것으로, 일제와의 독립전쟁에 대비하여 비행대와 무선전신대無線電信隊를 편성할 목적으로 추진한 사업이었다. 이러한 군사 교육 기관의 설립은 이후에 벌어질 독립전쟁을 지휘할 군사 간부를 양성한다는 점에서 임정의 군사 계획과 군사 정책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일련의 군사 계획과 군사 정책은 임시정부가 안고 있는 지역적 한계와 재정적 어려움으로 인해, 계획 자체에 머물거나 실행 단계에서 중단되고 말았다.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로서는 군대를 편성할 만한 인적·물적 기반을 갖추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재정적인 뒷받침이 마련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1920년대에 들어서 임시정부를 둘러싼 국내외적 상황은 좋지 않았다. 1921년과 1923년에 잇달아서 개최되었던 베이징의 군사통일회의와 상하이의 국민대표회의는 임정의 독립운동 최고기관으로서의 역할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향후 임시정부의 진로와 존폐여부를 논의했다.
(2) 1930년대 임정의 의열투쟁과 군사 정책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김구와 한인애국단원
임시정부는 1930년대에 들어서자 항일무장투쟁의 노선을 변경할 수 밖에 없었다. 1931년 9월 18일 일제에 의해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그동안 임정 자체의 대일활동이 부진했던 점을 타개하기 위해서 ‘특무공작特務工作’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당시로서는 임시정부가 대규모의 독립군을 동원하여 직접 항일전선에 나설 수 있는 처지가 못됐기 때문에, 인력과 경비가 적게 드는 의열투쟁義烈鬪爭을 전개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는 임시정부가 중일 양국 간의 전쟁을 독립운동의 호기로 삼아 이를 유리하게 활용하기 위해 대내외적으로 대일항쟁의 활성화를 촉진시키고자 한 것이다. 최소한 자원으로 최대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 도출된 의열투쟁은 군사조직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개인의 희생을 담보로 일제의 요인 암살과 침략기관의 폭파 등 극한적인 무력항쟁을 벌이는 것이었다.
1930년대 임시정부의 의열투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김구가 조직한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었다. 1932년 1월의 이봉창李奉昌의 일왕폭살사건과 4월에 발발한 윤봉길尹奉吉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는 침체되어 있던 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열기를 다시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특히 윤봉길의 의거는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蔣介石를 움직여 한국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에 이르렀다. 김구가 1934년에 중국의 뤄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에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을 설치하여 한인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한 것이 대표적이다.
ⓒ김용진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를 보도한 『도쿄아사히신문』 호외(1932. 5. 1.)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을 더욱 촉진시킨 것은 중·일전쟁의 발발이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임시정부에서는 전시체제에 대한 대비와 함께 이를 계기로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결행하기 위한 군사활동 방안을 강구했다. 이를 위한 대책으로 나타난 것이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의 설치였다. 군사위원회에서는 임시정부가 추진할 군사정책으로 ‘초급장교 양성’과 ‘1개 연대聯隊의 군대 편성’을 우선적 과제로 삼았다.
이와 아울러 임시정부에서는 향후 독립운동을 추진해나갈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계획을 확립했다. 1939년 11월 11일 국무회의에서 결정 통과된 「독립운동방략」이 그것이다. 당시 임시정부가 처해 있던 상황으로 보면 원대한 계획이었다고 할 수 있으나, 이를 추진할 만한 인적·물적 기반을 충분히 갖추지 못했기에 계획 단계로만 머무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독립운동방략」은 국내외 각지의 전 한민족을 총동원하여 일제와 직접적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이를 통해 조국 독립을 달성하려는 계획과 시도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이 현실화되어 나타난 것이 한국광복군의 창설이었다고 할 수 있다.
(3) 1940년대 대한민국 국군의 뿌리, 한국광복군의 창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이 처음 가지는 비행가 6인」, 『독립신문』 제70호(1920. 4. 27.)
마침내 임시정부는 1940년에 22년간의 피난 생활 끝에 충칭重慶에 안착하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충칭에 안착하면서 추진한 첫 사업은 한국광복군의 창설이었다. 임정 수립 초기에 계획한 군사정책, 즉 군대를 편성해서 일제와 독립전쟁을 전개하겠다는 계획을 충칭에 정착하자마자 실행에 옮긴 것이었다. 1940년 5월 김구는 광복군 창설 계획인 「한국광복군편련계획대강韓國光復軍編練計劃大綱」을 제출했고, 이는 “광복군은 중국 항전에 참전한다”는 조건 하에 장제스의 승인을 얻으면서 탄력을 받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국광복군은 같은 해 9월 17일 충칭시 자링강嘉陵江 기슭에 자리한 자링빈관嘉陵賓館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 전례식典禮式의 거행으로 창설되었다. 총사령에는 이청천李靑天, 참모장에는 이범석李範奭이었고, 창설 당시 인원은 약 30명이었다. 광복군은 창설 이후 지속적으로 병력을 모집하고, 또 단위부대로 지대支隊를 편성하면서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발전해 갔다.
한국광복군은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창설되어, 1946년 5월 16일 ‘복원선언서復員宣言書’를 발표하고 해산할 때까지 6년여 동안 활동했다. 광복 이후 1987년에 제정된 대한민국 헌법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했음을 명시했다. 이는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여 건립되었음을 밝힌 것으로, 곧 임시정부의 국군인 한국광복군 또한 대한민국 국군의 모체이자 뿌리임을 명실상부하게 대한민국 헌법에 천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한국광복군의 창설은 임시정부가 수립된 직후 군대를 편성해서 일제와 독립전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한 군사계획의 결실이었다. 임시정부는 1920년에 독립전쟁을 선포한 이래로 1945년에 광복할 때까지 항일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전쟁의 개전을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는 임시정부가 수립 초기부터 군대를 편성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것을 독립운동의 씨앗으로 삼았던 것이고, 그 씨앗이 한국광복군의 창설이라는 열매로 활짝 꽃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