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교와 국제연대
— 글. 도시환(동북아역사재단 전 독도실장·독도연구소장)
2026년은 백범 김구 선생 탄생 15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이다. 유네스코UNESCO는 2025년 10월 제43차 총회에서 2026년을 ‘김구 탄생 150주년 기념의 해’로 공식 지정했다. 이는 일제 침략에 맞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장이자 독립운동가인 김구 선생이 추구한 ‘문화의 힘’을 통한 평화 사상이 전 세계가 공유해야 할 보편적 가치임을 국제사회가 공인한 기념비적 성과이다. 1919년 3·1 운동은 일제의 무단통치에 항거해 전 세계에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 의지를 천명한 역사적 거사였다. 이러한 거족적 열망을 수렴해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전개된 외교 독립운동은 도덕적 정당성과 국제적 연대를 바탕으로 국권 회복을 추구했던 김구 선생의 사상과 실천이 집약된 궤적이며,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세계사적 유산의 출발점이다.
임시정부는 수립과 동시에 발표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함”을 선언하며 국민주권에 기반한 근대 국가의 비전을 제시했다. 이는 식민지 지배와 전제군주제를 넘어선 민주공화국 건설의 청사진이었으며, 한국 민족이 자주적인 국가를 운영할 역량과 의지를 갖추었음을 국제사회에 천명한 역사적 선언이었다.
임시정부는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핵심 전략으로 외교 독립운동을 채택했다. 당시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가 대두되자, 임시정부는 이를 중요한 외교적 기회로 활용하고자 했다. 강대국 중심의 국제질서 속에서 약소민족의 요구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계는 있었지만, 상하이를 거점으로 한 임시정부의 지속적인 외교활동은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져야 할 세계적 문제로 부각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국제 외교무대의 중심축인 유럽과 미국을 동시에 겨냥해 활발한 전방위 외교활동을 전개했다. 임시정부가 가장 먼저 주목한 곳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열린 프랑스의 파리강화회의였다.
임시정부는 신한청년당 출신 김규식을 외교총장 겸 파리위원부 위원장으로 임명해 파리로 파견했다. 김규식과 파리위원부는 ‘한국 민족의 독립 청원서’를 회의에 공식 제출했으며, 일제 침략의 불법성과 가혹한 식민 통치의 실상을 폭로하는 책자를 불어 및 영어로 발간해 각국 대표와 언론에 배포했다. 이들은 국제사회의 공의와 인도주의, 국제법 원칙에 입각해 한국의 주권 회복이 곧 동양 평화의 선결 과제임을 역설했다.
©독립기념관
파리강화회의 당시 김규식, 파리강화회의 파견 한국인 대표들과 파리위원부(앞줄 오른쪽이 김규식)
비록 일본의 외교적 저지와 강대국들의 소극적인 태도로 정식 대표 자격을 인정받지는 못했으나, 이 활동은 한국 독립 문제가 국제 외교무대에서 공식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닌다. 또한 일제 식민 통치의 부당성과 불법성을 국제사회에 환기시켰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외연을 세계로 확장하고 외교 독립운동의 지평을 넓히는 토대를 마련했다.
한편, 미국 워싱턴에서는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대미 외교활동이 전개되었다. 이승만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미국 정부와 의회, 언론계를 대상으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호소했다. 특히 1921년 개최된 워싱턴 해군군축회의를 주요 외교무대로 활용하여, 태평양과 동아시아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일본의 군사적 팽창을 억제하고, 한국의 독립이 보장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이러한 초기 외교활동은 강대국들의 자국 우선주의와 패권 정치로 인해 즉각적인 독립 승인을 견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한국인의 자주독립 의지와 국가 운영 역량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일본의 식민 지배가 한국인의 자발적 동의에 기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국제적으로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외교적 토대를 다지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독립기념관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 직후 현장 모습
1920년대 중반 이후 임시정부는 내부 노선 갈등과 재정난,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극심한 침체기에 직면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임시정부를 지켜낸 인물이 바로 백범 김구였다. 김구는 침체된 독립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고 국제사회의 관심을 환기하기 위해 1931년 임시정부 산하에 특무기구인 한인애국단을 조직했다. 이는 단순한 폭력적 저항이 아니라, 침략국의 핵심 수뇌부를 겨냥한 의거를 통해 한국인의 확고한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리고,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의 주요 의제로 다시 부각시키고자 한 절박한 외교적 전략이었다.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은 1932년 1월 이봉창 의사의 도쿄 의거와 같은 해 4월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훙커우공원 의거로 이어졌다. 특히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세계 각국 언론에 널리 보도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는 한국인의 자주독립 의지를 국제사회에 다시금 알리고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적 관심사로 재부각시키는 역사적 분수령이 되었다.
특히 만주사변 이후 일제의 침략에 고심하던 중국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장제스는 “중국의 백만 대군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냈다”고 격찬하며, 한국 독립운동의 의지와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이 의거는 임시정부 외교의 패러다임을 서구 열강을 향한 청원 외교에서 중국과의 실질적인 협력과 연대의 단계로 전환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를 토대로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공고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며 독립운동의 새로운 국면을 개척할 수 있었다.
윤봉길 의거 이후 임시정부는 일제의 잔혹한 보복을 피해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등지를 전전하며 약 8년간에 걸친 고난의 대장정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1940년 충칭에 정착한 임시정부는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했다. 김구는 분산되어 있던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고 전시 지도체제를 정비하는 한편,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공조를 통해 임시정부의 국제적 위상과 정통성을 한층 강화했다.
이 시기 임시정부의 주목할 만한 성과는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의 창설이었다. 광복군은 임시정부의 정규군으로서 독립전쟁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으며, 임시정부가 독자적인 군사 조직을 보유한 정치적 주체임을 국내외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임시정부가 단순한 망명단체를 넘어 정부로서의 정통성과 실체를 갖추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외교적 상징이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이는 한국의 독립운동이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는 정당한 독립전쟁임을 천명하는 동시에, 국제법상 교전단체Belligerent Status로서 지위를 확보하려는 시도였다. 이후 한국광복군은 영국군과의 협동 작전을 통해 인도·미얀마 전선에서 활약했으며, 미국 전략정보국OSS과의 긴밀한 협력하에 국내 진공을 위한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을 추진했다. 비록 일본의 조기 항복으로 독수리 작전은 실행되지 못했지만, 임시정부의 이러한 군사·외교활동은 한국 독립운동이 연합국과 함께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국제적 항전의 일환이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한국인이 광복을 수동적으로 맞이한 것이 아니라 독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투쟁한 주체였음을 국제사회에 알렸으며, 임시정부의 정통성과 독립운동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국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한국의 독립이 명시된 카이로 선언문
임시정부 외교활동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1943년 11월 개최된 카이로 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카이로 선언이었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의 윈스턴 처칠, 중국의 장제스가 참석한 이 회담에서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한국의 독립을 연합국의 공식 문서에 최초로 명시한 것으로, 임시정부가 수십 년간 전개해 온 독립 외교가 국제적으로 결실을 맺은 역사적 성과였다. 이러한 결실의 배경에는 김구의 주도적이고 지속적인 외교적 헌신이 있었다. 김구는 1943년 7월 중국의 장제스를 비공개로 만나 전후 연합국 정상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공식 명문화해 줄 것을 요청했다. 장제스는 이에 공감하며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 독립 조항이 선언문에 반영되도록 노력했고, 그 결과 한국의 독립이 연합국의 공식 문서에 처음으로 명시될 수 있었다. 또한 카이로 선언의 내용은 1945년 포츠담 선언 제8항에서 재확인됨으로써 한국 독립의 국제적 근거를 더욱 공고히 했다.
한편, 임시정부는 카이로 선언에 포함된 ‘적절한 절차in due course’라는 단서가 한국의 즉각적인 독립을 유예하고 신탁통치의 근거로 해석될 가능성에 우려를 표하며 이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인식은 해방 이후인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제기된 신탁통치안에 대한 반탁운동으로 이어졌다. 이후 1947년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과 함께 한국 문제가 국제연합UN으로 이관되면서 신탁통치 구상은 사실상 추진되지 못했다. 이처럼 카이로 선언은 강대국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라는 한계 속에서도, 연합국이 한국의 독립 원칙을 공식 문서에 처음 명시했다는 점에서 임시정부 외교의 중요한 성과이자 한국 독립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국제적 근거가 되었다.
카이로 회담
ⓒ한국학중앙연구원
백범 김구
김구 자서전 『백범일지』
ⓒ김구재단
백범 김구 선생이 애송한 서산대사의 선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독립운동은 근대 국제법 원칙과 국제사회의 공의에 기반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확장해 나간 과정이었다. 상하이에서 시작된 외교적 노력은 파리와 워싱턴에서의 독립 청원,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을 거쳐 연합국과의 협력 기반으로 확대되었으며, 마침내 카이로 선언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연합국의 공식 문서에 명시하는 역사적 성과를 거두었다.
이 외교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던 김구는 독립을 단순한 국권 회복을 넘어, 인류의 평화와 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도덕적 국가 건설의 과제로 인식했다. 그가 『백범일지』에서 역설한 ‘높은 문화의 힘’은 무력이나 패권주의가 아닌, 문화적 역량과 도덕성을 바탕으로 세계와 소통하고 협력하려는 선구적인 국제 연대의 비전이었다.
이러한 김구의 사상은 그의 탄생 150주년인 2026년, 유네스코 기념의 해로 지정되면서 평화와 문화의 가치를 지향하는 인류 보편의 이상으로 국제적인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과거 식민 지배의 가혹한 현실 속에서 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쳤던 그의 꿈은 오늘날 ‘문화의 힘’을 통한 세계 평화와 인류 공존의 이념으로 승화되어 세계적 유산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늘날 글로벌 중추 국가Global Pivotal State로 성장한 대한민국의 뿌리에는 임시정부의 주체적인 외교활동과 국제연대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약소국의 한계를 극복하고 주권을 수호해 낸 임시정부의 외교 독립운동은, 역사 왜곡과 영토 갈등이 지속되는 동북아시아 정세 속에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한 교훈을 준다. 이는 대한민국이 평화와 번영의 미래를 향해 중단 없이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살아있는 위대한 유산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 김구 저, 『백범일지』의 「나의 소원」 -
踏雪野中去 不須胡亂行 답설야중거 불수호란행
今日我行跡 遂作後人程 금일아행적 수작후인정
“눈덮인 들판을 걸을 때
어지러이 걷지마라
오늘 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이정표이리니.”
- 백범 김구 선생이 애송한 서산대사의 선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