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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독립운동

프랑스 망명정부 독립운동

세계의 독립운동

프랑스 망명정부 독립운동

“언젠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시 한번자신들이 원하는 국민, 즉 하나의 민족이 되고, 매우 발전하는 국민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 글. 정상천(파리 1대학 국제관계사 박사, 번역가)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었던 프랑스는 1940년 5월 10일 독일의 침공으로 단 6주 만인 6월 14일 수도 파리가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식민지를 거느린 유럽의 열강이었다. 이와 같은 어이없는 패배로 70년간 유지되었던 프랑스 제3공화국도 막을 내리고, 프랑스의 휴양도시인 비시Vichy에 독일에 협력적인 페탱 원수의 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당시 전前 정부의 국방부 차관이었던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장군은 독일에 굴복하기를 거부하고 끝까지 독일에 대한 항전을 이끌어나가기 위해 1940년 6월 17일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였다. 이 글에서는 당시 프랑스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드골이 어떻게 최종적으로 프랑스 임시정부의 수반이 될 수 있었는지, 그리고 프랑스 임시정부의 전 단계인 자유프랑스La France libre의 발전 과정과 독립운동 추진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프랑스 임시정부 사이의 협력관계에 대해서도 알아보도록 하겠다.

1940년 6월 18일의 호소

드골 장군은 영국으로 망명한 바로 다음 날인 6월 18일 저녁 8시에 BBC 라디오 방송을 통해 프랑스인들에게 독일에 대항해 끝까지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프랑스는 결코 혼자가 아니며, 희망이 사라진 것도 아니고 종국적인 패배가 확정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1940년 6월 18일의 호소L'appel du 18 juin 1940’이며, 이후 드골 장군은 주기적으로 BBC에 출연하여 조국을 구하기 위해 함께 싸우자고 독려하였다. ‘레지스탕스résistance’는 원래 ‘저항, 반대, 항거’를 의미하는 보통명사였으나, 드골의 ‘6월 18일의 호소’ 이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등에서 점령국에 맞선 ‘저항 운동’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드골 장군이 처음 BBC 방송을 시작했을 때는 라디오 방송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8백만 명의 피난민들이 길거리에 피란 중이었고, 외국에서 송출되는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었던 프랑스인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골의 꾸준한 방송과 언론, 외교, 군사 활동 등에 의해 조금씩 프랑스 국민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하였다.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수복되고 그다음 날 드골 장군이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개최된 개선행사에 선두에 서서 환호하는 군중들에게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명실상부한 프랑스 국민들의 지도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샤를 드골 재단(Fondation Charles de Gaulle)

BBC 방송을 통해 대독 항전을 촉구하고 있는 드골 장군

드골과 자유프랑스La France libre

‘자유프랑스’라는 용어는 드골 장군이 1940년 6월 22일에 한 연설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자유프랑스는 처음에는 런던에서 독일에 저항하는 군사 조직으로 출발하였다. 이후 드골의 주도로 1940년 10월 27일 콩고의 브라자빌에 제국수호평의회Conseil de Défense de l'Empire가 창설됨에 따라 자유프랑스가 비정치적 노선에서 정치적 운동으로 전환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1941년 9월 24일 프랑스 국민위원회Comité National Français가 탄생하여 망명정부에 가까운 지위와 공권력을 행사하였으며, 준 정부적 성격을 띠었다. 드골은 프랑스 식민지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대독 저항의 본부를 런던에서 알제리로 옮겼다. 1943년 6월 3일 알제리의 알제Alger에서 드골을 중심으로 프랑스국민해방위원회Comité Français de Libération Nationale : CFLN가 수립됨에 따라 국내외 레지스탕스 세력들의 통합이 더욱 가속화되었으며, 불완전하였지만 드골 장군과 알제리 주둔군 사령관이었던 지로Henri Giraud 장군의 이두정치체제가 형성되었다. 1943년 말까지 영국, 미국, 소련 등 37개국이 CFLN을 승인하였지만 공식적인 정부조직으로 인정한 것이 아니라 자유프랑스를 대표하는 정치 및 행정 기관으로 인정하였다. CFLN을 계승하여 1944년 6월 3일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Gouvernement Provisoire de la République française : GPRF가 수립됨에 따라 각국으로부터 프랑스의 합법적인 정부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처칠이 프랑스 내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드골을 자유프랑스의 지도자로 인정한 이유는 첫째, 프랑스의 비시 정부가 독일과 휴전협정을 체결한 이후 프랑스 정부 각료 중에 드골만큼 강력하고 일관되게 대독 항쟁을 주장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드골은 일평생 ‘거부refus’의 상징으로 각인되어 있는데,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것에 대한 거부, 광복 이후 영국과 미국의 패권에 대한 거부(NATO 탈퇴와 영국의 유럽 경제 공동체 가입 반대 등), 분열을 조장하는 프랑스 정당들의 독점체제에 대한 거부 등이 주요 사례이다. 드골은 프랑스의 주권을 대표하려는 강한 결의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권위나 국가의 독립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타협을 거부했다. 둘째, 영국으로서는 프랑스에 독일과 협력적인 비시 정부가 수립되면서 프랑스의 독립성과 대독 저항을 대표할 인물이 절실히 필요하였다. 전후 국제질서의 재편 과정에서 연합국의 일원으로 프랑스를 참여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드골을 인정함으로써 프랑스의 지속적인 참여와 정통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드골은 뛰어난 연설력과 결단력을 갖춘 인물로서 전후戰後 프랑스 민족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드골은 자유프랑스 수립 이후 대독 투쟁 방향으로 세 가지를 설정하였다. 첫째는 독일에 대항해서 싸울 군대 창설이었다. 둘째는 영토적 기반을 조성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프랑스의 해외영토에서 답을 찾았다. 마지막으로, 자유프랑스에 대해 연합국 정부로부터 국제적인 승인을 받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서 승전국의 일원으로 전후 국제질서 재편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드골은 ‘6월 18일의 호소’ 이후 자유프랑스군대Force Française Libre : FFL를 먼저 창설하였고, 이후 자유프랑스 해군과 공군도 각각 창설하였다. 이 과정에서 영국 정부의 재정적, 물적 지원이 있었음을 물론이고, 그들에 대한 지휘권도 영국 정부에 있었다. 1940년 7월 14일 런던에서 열병식 할 때의 자유프랑스군은 겨우 2,400여 명이었으나, 1942년 6월에는 7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에는 약 56만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서부전선에서의 대규모 군사적 기여를 통해 프랑스의 해방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40년 10월 27일 콩고의 브라자빌에 프랑스의 영속성과 주권을 상징하는 제국수호평의회가 창설됨에 따라 인구 600만 명과 3백만㎢의 광대한 영토를 관리하는 정치체제가 탄생하였다. 국제적인 승인을 얻는 것과 관련해, 자유프랑스 수립 초기에는 영국 정부만이 드골을 자유프랑스의 지도자로 승인을 했으며, 대부분의 국가들은 페탱 원수의 비시 정부를 승인하고 있었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비시 정부와 적어도 1942년 4월까지 밀접한 외교관계를 유지하였고, 드골의 자유프랑스를 불신하였다. 이는 루스벨트 대통령 주변의 반드골주의자들이 드골의 독재자로 인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미국은 북아프리카에서 드골을 활동을 방해하고, 견제하였다. 미국이 자유프랑스를 통합된 프랑스의 대표로 보게 되는 것은 1944년이 되어서였다. 1944년 10월 23일 미국, 영국, 소련은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를 유일한 합법정부로 인정한다는 공식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는 영국을 필두로 한 연합국들이 연합군의 승리에 자유프랑스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국내 레지스탕스와의 관계

독일에 대한 레지스탕스 운동을 펼쳤던 주요 세력은 드골의 자유프랑스,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 지로 장군이 이끄는 북아프리카 식민지 세력으로서, 이들 3개 세력이 서로 각축을 벌였다. 이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였다. 이들 세력을 통합하고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혀 나가는 것이 드골의 자유프랑스가 연합국으로부터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었다. 북아프리카에 수립된 프랑스국민해방위원회CFLN에서의 이두정치체제는 1943년 11월 드골의 승리로 끝났다. 정치적으로 더 역량이 뛰어났던 드골은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지만 명확한 정치적 비전이 부족했던 지로 장군을 축출하고 CFLN을 장악하면서 자유프랑스의 지도자로서의 그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아울러, 그는 프랑스 국내 레지스탕스 운동권의 단일화를 위한 노력을 병행하였다. 1942년 4월 드골은 자신이 런던에서 작성한 ‘레지스탕스운동선언Déclaration aux Mouvement de Résistance’을 프랑스 국내로 전달하면서 독일 점령에 맞서 싸워야 할 당위성과 전쟁 후 프랑스의 정치적 미래를 준비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를 위해 드골은 장 물랭Jean Moulin을 프랑스 국내로 파견하여 다양한 레지스탕스 세력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1943년 1월 물랭은 어려운 협상 과정을 거쳐 ‘레지스탕스연합운동Mouvement Unis de Résistance’ 결성에 성공하였다. 같은 해 3월 드골은 국내 레지스탕스 세력들과 자유프랑스의 통합을 위해 레지스탕스국가평의회Conseil National de la Résistance를 창설하고 물랭을 의장으로 임명하였다. 국내에서 활약하던 물랭은 독일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하였지만, 그의 통합노력 덕분에 국내 레지스탕스 운동가들은 드골을 점차 그들의 지도자로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국내 레지스탕스 세력들은 비시 정부의 경찰과 독일군을 상대로 게릴라전과 암살 전개, 나치군과 비시 정부의 움직임에 대한 정보 수집 및 전달, 반독일, 반 비시 정부 선전물 배포 등을 통해 프랑스 해방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 레지스탕스의 전국 무장봉기가 시작되었으며, 철도 등 기간시설 파괴, 독일군 보급 차단 등의 활약을 펼쳤다.

ⓒ유럽 디지털 역사 백과사전 (EHNE : Encyclopédie d’histoire numérique de l’Europe)

총기 사용법을 배우고 있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대원들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관계

1944년 6월 2일 알제에서 국내외 레지스탕스 세력들을 통합한 정치 기구인 프랑스국민해방위원회CFLN를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GPRF라는 명칭으로 변경하는 제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에 따라 그다음 날인 6월 3일 GPRF가 공식적으로 출범하였다. 1944년 8월 25일 파리가 해방된 후 GPRF는 8월 31일 수도로 이전하여 새로운 헌법이 채택될 때까지 프랑스를 통치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에 이미 설립이 되어 상하이 시기(1919~1932), 이동 시기(1932~1940), 충칭 시기(1940~1945)를 거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1940년 6월 드골의 자유프랑스가 창설된 이후 다양한 대독투쟁과 국내외 레지스탕스 세력들 간의 견제와 이합집산 등의 정치적 여과 과정을 거쳐 파리 해방을 몇 개월 앞두고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는 점에서 우리 임시정부의 형성과정과 다르다.

ⓒ위키피디아(Wikipédia)

파리 해방의 날 개선문을 걷고 있는 드골 장군과 일행들(1940. 8. 26.)

충칭 시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알제에 있던 드골 장군의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1944년 6월~1946년 1월) 사이에도 접촉이 있었다. 1944년 7월 1일 충칭 주재 프랑스 대사관은 알제리에 있는 드골 장군의 프랑스 공화국 임시정부에 전문電文을 보내어 충칭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문의하였다. 이에 대하여 프랑스 임시정부는 비밀 전문을 보내어 충칭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1944년 10월 드골의 프랑스 임시정부가 열강으로부터 승인을 받게 되자 주미외교위원부 이승만 위원장은 드골 장군에게 축하 서한을 보내었다. 1944년 11월 20일에는 조소앙 외무장관과 충칭 주재 프랑스 대사관 관계자 간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조소앙 외무장관은 프랑스 외교관에게 레지스탕스 조직 구성과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CFLN가 연합국들로부터 승인을 받기 위해 취한 조치들에 대해 문의하였다. 드골의 임시정부는 우리 임시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프랑스 측 사료에 따르면 ‘비공식적으로 사실상의de facto 승인’을 한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1965년 9월 18일 엘리제궁에서 드골 대통령이 이수영 신임 주불대사에게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한 말로 이 글을 맺는다.


“언젠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다시 한번
자신들이 원하는 국민, 즉 하나의 민족이 되고, 매우 발전하는
국민이 될 날이 올 것입니다.”

“Le jour viendra où le peuple coréen
redeviendra ce qu'il veut être : un seul peuple et un
peuple en plein développ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