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자료
독립운동가 서영해의 『어느 한국인의 삶』
— 글. 황인순(덕성여자대학교 차미리사 교양대학 조교수)
ⓒ황인순
서영해가 거주하던 곳이자 고려통신사였던 프랑스 파리의 7, Rue Malebranche
서영해를 알게 된 것은 우연한 기회였다. 프랑스어로 출판된 한국설화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원본을 찾다가, 파리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한 저자 서영해를 알게 되었다. 그는 1920년대부터 광복 전까지 파리에 체류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유럽 외교 업무 등을 담당한 독립운동가이다. 1902년 부산 태생으로 본명은 서희수이며 상하이를 거쳐 1920년 파리로 건너갔다. 파리에 머무르던 서영해는 1929년 고려통신사Agence Korea라는 이름으로 자신이 살던 주소지에 일종의 출판사를 설립한다. 이를 통해 신문 및 잡지에 한국의 독립 당위를 알리는 기고 활동을 활발히 펼쳤는데, 1930년대 프랑스에서 안창호 석방을 위해 힘쓰는 한편, 「유럽의 자유양심에 고함Appel á la conscience libre de l'Europe」이라는 기고문을 프랑스 언론에 배포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1934년 주불외무행서 외무위원으로 임명되었고, 1945년에는 임시정부 주불대표로 임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1
사진은 서영해가 당시 거주했던 집이자 고려통신사가 위치했던 곳의 모습이다. 이곳은 그간 호텔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2023년 5월경 방문했을 때는 이미 호텔이 폐업한 상태였다. 잘 알려진 대학가인 파리 5구의 한 모퉁이에 위치한 서영해의 집은, 다소 한적한 골목에 있어 대학가의 활발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서영해가 처음 파리로 왔을 때는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고 하니 이곳에서 혈혈단신격으로 생활과 학업과 쓰기에 전념했을 것이다. 파리에서 학교를 다니고 프랑스어를 배운 서영해는 기고문뿐 아니라 흥미로운 단행본을 두 편 출간했다. 『어느 한국인의 삶Autour d’une vie coreenne』(1929)과 『거울, 불행의 원인Miroir, cause de malheur ! et autres contes coréens』(1934)이 그것인데 두 편 모두 프랑스어로 기술되었고 프랑스에서 출판하였다. 전자는 서영해가 설립한 고려통신사에서 출판된 소설 형식이고, 후자는 Eugène Figuière에서 출판된 한국 설화 모음집이다. 프랑스 간행물이므로 프랑스 국립 도서관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에서도 디지털 자료로 확인할 수 있다. 2
본고에서는 이중 『어느 한국인의 삶』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제목 아래에는 ‘한국역사소설’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한국 역사에 관한 소설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으나 소설이 역사와 허구 그 사이에 어디쯤 위치하기 때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소설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을 약간의 허구적 서사와 혼합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박선초이다. 선초라는 이름은 조선을 거꾸로 쓴 것처럼 보이기도 하므로 그렇게 본다면 조선과 조선인 전체를 상징하는 총체성을 드러내는 것 같다. 동시에, 부산 태생, 유복하나 양반 신분은 아닌 집안 태생, 중국에서 귀화하여 그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도모하는 면 등 저자와 유사한 점이 많은 주인공은 서영해 자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소설은 크게 3부로 나뉘는데 1부는 1900년대 한국의 문제적 상황과 그에 저항하는 움직임에 대한 것이다. 2부는 박선초가 이전 시대의 향수를 떠올리는 부분으로 한국의 전근대적 전통을 설명하고 한국의 옛이야기 등을 소개한다. 그리고 3부는 독립을 위한 전방위적 노력을 보여주고 독립선언서 전문을 수록하면서 독립의 의지를 피력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소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지만, 문학적인 성격을 강하게 드러내는 소설이라기보다는 확장된 형태의 독립선언서이면서, 한국의 과거와 현재를 총체적으로 소개하여 한국 독립의 당위를 기술할 목적을 충실히 따른다. 임시정부의 유럽 외교를 위해서라는 서영해의 프랑스 체류 목적을 고려한다면 이는 일견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나 단순히 한국의 역사, 문화, 문학 등을 자세히 소개한다는 이유라면 굳이 소설적 형식을 따를 필요는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문학과 이야기를 가진 개별적 공동체가 존속해야 한다는 당위를 제시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개별의 문학과 문학적 쓰기를 남겨두고자 한 저자의 지향이라 볼 수 있다.
『어느 한국인의 삶』
ⓒ국립민속박물관
『거울, 불행의 원인』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으로 독립선언서 전문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과 한국 설화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의 옛이야기들이 적지 않게 수록되어 있다는 두 가지 특징을 들 수 있다면, 전자는 책의 목적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며 후자가 소설의 문학성을 구현하는 것이다.
전자가 뚜렷하게 드러난 3장은 「독립선언서Déclaration d'Indépendance la République de Corée」라는 제목으로 전문을 수록하여 실제의 독립선언서를 의도적으로 부각한다. 그러나 독립선언서에 이어지는 소설의 결말은 박선초가 1921년 말 일본 경찰에 붙잡혀 숨을 거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것은 독립의 가능성에 대해 서영해가 마냥 희망적인 태도를 견지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문명국들이 약소국을 핍박하는 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며 박선초가 그 자체로 “인본주의이며, 정의이며, 그리고 자유”라는 문장으로 끝맺는 소설의 마지막은 결과와 상관없이 이어질 독립의 의지를 드러낸다.
반면 한국의 이야기들이 나오는 부분 역시 적지 않다. 가장 첫 부분을 단군신화로 시작하며, 이후 일본과의 관계를 서술하는 데 옛날이야기와 같은 방식을 차용하기도 한다. 옛이야기가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된 2부는 다소 이질적이나 가장 문학적인 부분이다. 여기서 박선초의 고향인 영산의 풍경을 묘사하고 한국의 전통과 풍습 등을 소개하는데, 할머니가 들려주던 이야기로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선초가 집안의 족보를 읽는 과정에서 ‘첫날밤에 아기 낳은 며느리’ 이야기가, 그리고 결혼 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는 ‘서희 전설’류의 이야기가 차용된다.3 옛이야기는 조선의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전근대적 관점으로의 회귀가 아니라 민중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로 향한다. 소설 내내 적극적으로 계급의 한계를 비판한 서영해는 설화 역시 ‘민중이 공유하는 이야기’이기에 가치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를 전제로 한 다시쓰기 속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가진 선언과 이야기, 당위와 문학이 만난다.
‘번역’은 결국 번역의 불가능성을 환기하는 작업이라고도 한다. 그만큼 문학적 다시 쓰기란 지난한 작업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기고문과 편지를 통해 이미 충분히 한국이라는 나라를 ‘호명했던’ 서영해는 이에 그치지 않고 가장 지난한 방식으로 한국이라는 나라를 ‘다시 쓰기’하고자 했다. 그것은 그가 구상한 근대 이후의 한국이 어떤 모습이었는지에 대한 암시일 것이다. 조선의 전통과 근대적 지향 아래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는 모두의 소망이었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만은 않다. 문학적 상상과 가능성이 만들어 나가는 한 켠이 그 새로운 세계 내에 존재하기를 바랐다고 해석해도, 크게 지나치지는 않을 것이다.
1_ 서영해의 활동과 파리 체류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한국근대사료DB (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의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과 한민족 독립운동사에서 확인하였다.
2_ https://gallica.bnf.fr/accueil/fr/html/accueil-fr 또한 국내에도 관련 자료들이 적지 않다. 국립중앙도서관의 영해문고와 서영해의 고향인 부산박물관에도 관련 자료들이 보관되어 있다.
2_ 해와 달이 된 오누이’와 ‘서희 전설’은 <거울, 불행의 원인>에 각각 ‘수수의 얼룩’과 ‘한국의 전설’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