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인물들
프랑스 파리에 스러진 독립운동의 불꽃, 황기환과 홍재하
― 글. 이장규(파리 시테 대학교 박사)
샬레 교수의 황기환 추도문(1923. 7. 10.)
1차 대전 종전 후, 1919년 파리에서 세계질서를 재편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한국과 같은 식민지 상태에 있던 약소민족들에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공하였고 각각 대표단을 파리로 파견했다. 우리 독립운동계도 김규식을 대표로 선임해 강화회의가 열리는 파리에 급파했다. 당시 불모지와 다름없었던 파리에서 세계열강들을 상대로 펼쳤던 파리위원부의 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첫 외교 활동이었다. 이들은 강화회의 및 각국 대표단에 조국의 독립을 청원하였고, 일본의 무자비한 비인륜적 만행을 국제사회에 고발하며 괄목할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한국 문제는 강화회의에서 철저히 외면을 받았다. 결국 8월 초 김규식은 파리를 떠나 미국으로 향하였고 파리위원부는 황기환黃玘煥, Earl K. Whang이 이끌게 되었다. 임시정부로부터 별다른 지원도 없이 유럽에서 보낸 그의 삶 전체는 독립을 향한 간절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1923년 4월 17일 황기환이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인해 불꽃 같은 삶이 꺼졌을 당시 ‘한국친우회’의 펠리시앙 샬레Félicien Robert Challaye는 추모글을 프랑스 인권연맹Ligue des droits de l’Homme 기관지에 게재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그를 기억했다. “… 당신은 고귀한 품성과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이었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매력적인 예의를 보여주었습니다. 당신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바쳤고 인류의 자유와 국제 정의의 대의를 위해 영웅적으로 헌신했습니다. 당신의 정신이 극동의 믿음에 따라 살아남기를 바라며, 우리의 다정한 존경과 깊은 애도의 마음을 바칩니다.”
1886년 평남 순천順川 태생의 황기환은 일찍이 1904년 하와이를 통해 미국에 도착해 캘리포니아 래드랜드Redlands 지부의 공립협회共立協會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5월 미군에 입대하여 1919년 6월 초까지 유럽 전선에 배치되어 복무했다. 1919년 6월, 김규식의 부름을 받은 황기환은 즉시 파리위원부에 합류하여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주력한 부분은 역시 공보활동이었는데 다양한 매체를 통하여 한국의 현실을 국제사회에 끊임없이 알렸다. 총 23호까지 발행되었던 『통신전Circulaire』을 매호 2천 부씩 발행하여 유럽 내 각 언론기관과 강화회의의 각국 대표단 및 프랑스 저명인사들에게 송부하였다.
1919년 9월에는 『한국의 독립과 평화Le Mouvement d’indépendance de la Corée et la Paix』라는 책자를 6,500부 제작하여 강화회의 및 각국 대표단과 언론사·인사들에게 배포하였다.
1920년 5월부터는 총 14호까지 발행된 『자유한국La Corée libre』를 간행하여 당시 급변하던 국제 정세와 한국 독립운동 관련 소식을 전하였다.
1920년 12월에는 『구주의 우리 사업』을 편찬해 파리위원부의 활동을 세세히 기록하여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한 예로 일본당국이 한국 내에 자치권을 부여한다고 발표한 기사를 접했던 황기환은 8월 23일 『라 쁘띠트 헤퓨블리끄La Petite République』를 통해 “한국 국민들은 자치가 아니라 완전무결한 독립을 원한다. 한국인들은 받아들일 수가 없으며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반박 기사를 게재하며 일일이 대응했다.
황기환은 국제사회와의 연대도 모색하였다. 1920년 1월 8일 목요일, 파리 지리학회 강당에서 그는 프랑스 인권연맹과 함께 ‘극동에서 위협받는 평화La Paix menacée en Extrême Orient. Chine et Corée’라는 주제의 콘퍼런스를 주최하였다.
특히 3·1운동 당시 일본의 잔혹한 진압을 현장에서 직접 목도했던 펠리시앙 샬레 교수는 생생한 증언을 담은 연설 후 참상을 촬영한 슬라이드 필름을 상영하여 청중들로 하여금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황기환은 베트남의 호치민胡志明, Ho Chi Minh과 같은 약소국가 지도자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특히 인권연맹을 비롯한 한국 독립을 옹호하는 프랑스 인사들과의 꾸준한 교류를 통해 1921년 6월 23일 ‘한국친우회Les Amis de la Corée’가 창립되는 결실을 맺었다.
황기환은 러시아를 탈출하여 영국 에든버러에 머물던 한인 노동자들을 구출하기 위하여 영국 외무부와 프랑스 노동부를 오가며 구명운동을 전개하였다.
결국 35명의 한인을 구출해내고, 이들을 프랑스 노동부와 협의하여 마른Marne 지역 스위프Suippes에 정착시켰다.
이후 황기환은 스위프 노동자들과 당시 한인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프랑스 최초의 한인단체 ‘재법한국민회在法韓國民會’를 결성하였다.
황기환이 홀로 파리에서 활동할 당시 재법한국민회의 회장으로서 그를 물심양면 도왔던 이는 홍재하洪在厦 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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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 교육생과 홍재하(1950년대)
홍재하는 경기도 양수군에서 꽤 규모 있는 목재상을 운영한 부친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서울로 유학해 배재학당을 다녔다. 이후 독립운동에 가담하다 일제 경찰의 추적을 피해 연해주로 피신했다. 당시 발급받은 ‘일본제국 해외 여권’에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 인정환印正煥이라는 이명을 사용하였다. 이 이름은 스위프에 체류 등록 시에도 프랑스식 표기인 ‘In Chiyon Fuan’이라는 이름으로 그대로 사용했다. 그는 1917년 러시아 내전 당시 러시아 백군 소속 부대원으로 8개월간 참전했으나, 적赤군의 승리로 인해 러시아 서북단 무르만스크까지 밀려갔다. 이곳에서 철병하는 영국군의 마지막 선박인 ‘산타엘레나Santa Elena’호에 간신히 승선해 영국 에든버러에 도착했다. 이후 황기환에 의해 구출된 홍재하는 도버해협을 건너 천신만고 끝에 프랑스 파리 동쪽 200킬로미터 지점의 스위프에 정착해 재법한국민회를 조직했던 것이다.
결국 이들의 노력으로 1921년 6월 제네바에서 열린 대회에서 한국 문제가 정식으로 상정되어 각국의 지대한 관심과 동정을 얻는 성과를 거두었다. 1923년 파리위원부의 마지막 구성원이었던 황기환마저 미국으로 떠나자 홍재하는 공백을 메우기 위하여 파리위원부를 유지하겠다는 의지를 워싱턴 구미위원부에 전달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불가하다는 답신을 받으며 그의 소망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이후 홍재하는 재법한국민회를 ‘파리한인친목회’로 개편해 한인들의 결속을 다졌다. 1925년 국내에서 대홍수가 났다는 소식에는 재불 한인 노동자 40여 명을 설득해 불화 2,000프랑과 일화 160원의 성금을 모아 국내 언론사에 보냈다. 1934년에는 삼남 수해 의연금을 동아일보사에 기탁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에는 전쟁의 희생자들을 위해 한국적십자회를 통해 거액의 기부금을 출연하여 주불공사에게 1950년 11월 13일 자로 감사 서한을 받기도 했다.
홍재하는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아이들 이름에는 프랑스 이름 외에 ‘홍’을 더 붙였고 그의 딸들은 모두 한국 남자와 결혼했다. 매년 3・1절과 광복절이면 반드시 집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해방 이후 홍재하가 직접 작성한 대한민국 주불공사관 등록신청서의 체류 목적란에 기입한 “국속을 복슈허고 지구상 인류에 평등허기를 위허여”라는 글을 통해 그의 애국 의식을 짐작할 수 있다. 해방 후 그의 자택에는 노기남 주교, 장면, 조병옥, 장택상, 정일형 모윤숙 등 많은 한국인들이 줄을 이었다. 홍재하 부부는 정성을 다하여 이들의 조국 재건 노력에 건투를 빌었다. 특히 1947년 장면을 만났을 당시에는 귀국의 뜻을 간곡히 밝혔으나 실현되지 못했고 얼마 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귀국길은 더욱 요원해졌다. 평생을 조국을 그리워하며 지냈던 그는 콜롱브Colombes 자택에서 1960년 2월 10일 향년 68세로 타계했다.
프랑스 스위프에서 3・1절 1주년 기념식을 연 한인 1세대들
최근 발굴된 홍재하의 차남이 소장했던 자료들 속에서 파리대표부의 황기환과 홍재하가 나눈 서신이 다수 발견되었다. 서신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지만 황기환은 스위프 한인들을 지도하고 격려하며 성심껏 도왔고 스위프의 한인들은 많은 재정지원을 하며 파리위원부의 독립운동을 도왔다. 평생 고국을 그리며 외롭고도 치열하게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황기환과 홍재하는 결국 이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황기환은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각고의 노력으로 2023년 4월 사후 100년 만에 유해가 봉환되어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홍재하는 2019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사후 62년만인 2022년 11월 그토록 그리던 고국의 품에 안겼다.
황기환과 홍재하는 유럽의 낯선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단지 외교와 조직 활동에 그치지 않고, 현지 한인 사회를 구축하고 국제 여론전을 이끌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뜻을 유럽 무대에 전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독립운동의 불꽃을 지켰으며, 이들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독립운동사의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