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유럽 내 임시정부 관련 사적지 이야기
— 글. 김도형(월간『순국』편집위원)
벨기에 브뤼셀 만국평화대회 개최지
오늘날 세계사에서 근대 사회 제도가 시작된 곳으로 인정받는 유럽은 20세기 초,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며 새로운 국제질서가 논의되던 역사의 중심이었다. 우리 독립운동가들 역시 유럽을 세계와 소통하는 창구로 여겼고 많은 활동을 벌였다. 또한 유럽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주권을 잃었던 약소민족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준,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국제무대였다.
유럽에서 ‘벨기에’는 ‘유럽의 싸움터’라고 불린다. 강대국에 둘러싸여 주변 국가들의 많은 침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식민 지배도 당하였기 때문이다. 한국도 주변 국가들로부터 많은 침략을 받았고, 식민 지배를 당한 역사가 있다는 점에서 벨기에와 닮아 있다. 벨기에인들은 제1,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침략으로 엄혹한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자유 벨기에La Libre Belgique』라는 지하신문을 발간하여 독일에 저항하였다. 한국인들도 1919년 3월 1일에 독립을 선언하고 지하신문 『조선독립신문』을 발행하면서 독립투쟁을 이어갔다. 이런 비슷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기에, 유럽에서는 한국을 ‘동양의 벨기에’라고 하여 한국의 독립에 강한 지지를 나타냈다.
스위스 루체른 국제사회주의대회 개최지
스위스 제네바 국제적십자사위원회 본부
유럽 지역에서 한국 독립운동의 중심지는 프랑스의 수도 파리였다.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 대표들이 평화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파리강화회의를 개최하자 신한청년단은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 대표로 파견하였다. 김규식은 중국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의 파리대표Delegate at Paris’로 정식 임명되었다. 김규식은 파리 9구 샤토덩Rue de Chateaudun 38번지에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사무실을 설립하고, 한국 독립을 대외적으로 선전하기 위해 한국통신국Bureau d'information Coréen을 설치하였다. 통신국에서 발행한 『통신전Circulaire』을 통해 3월 1일 한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독립국이 되었으며 만세 시위를 했다는 사실을 각국 대표단들에게 알렸다. 또한 프랑스어로 작성한 「독립청원서Pétition」와 「비망록Mémoire」을 파리평화회의 의장 클레망소Clémenceau에게 정식으로 제출하여 한국 독립의 정당성을 선전하고자 하였다.
김규식이 프랑스를 떠난 이후에는 파리위원부를 대신하여 서영해가 유럽 지역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다. 서영해는 1920년 프랑스로 유학을 와서 초등부터 고등교육 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파리에 있는 고등사회연구학교에서 언론학을 배웠다. 그리고 1929년 ‘고려통신사Agence Korea’라는 언론기관을 설립하여 파리를 중심으로 유럽 각국에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 선전 활동을 펼쳤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회의에서는 1936년 3월 9일 서영해를 주법특파위원駐法特派委員으로 선임하면서 파리위원부 이후 끊어졌던 대유럽 외교를 이어갔다. 주법특파위원 서영해는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제1회 만국평화대회Le Rassemblement Universel pour la Paix, World Peace Congress, Brussels에 참석하여 각국 대표들에게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9개국 조약회의九國公約會議, Nine Power Treaty Conference’에 참가하였고, 임시정부 대표와 신문기자 자격으로 외교 활동을 펼쳤다. 1940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지배하고 있을 당시 서영해는 임시정부에 의해 ‘주법대표駐法代表’로 임명되었다.
스위스는 유럽 내에서 정치적, 외교적으로 오랜 기간 중립적 입장을 지켜온 영세중립국이다. 이런 중립국의 지위로 당시 스위스는 유럽외교의 중심지 중 하나였고, 지금도 스위스에는 각종 국제기구 본부가 존재한다. 스위스 지역에서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로는 이관용과 조소앙이 있다. 이관용과 조소앙은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국제사회주의대회International Socialist Conference에 참석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합법성과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이에 1919년 8월 9일 25개국 대표들은 한국의 요구를 만장일치로 가결하고 한국을 국제연맹의 회원으로 받아들이도록 결정하였다.
파리위원부는 제네바에 있는 국제적십자위원회 본부와 교섭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학업을 위해 스위스로 돌아갔던 이관용을 대한적십자사의 구주지부장 자격으로 1920년 1월 15일 제네바로 보냈다. 임시정부는 대한적십자사를 국제적십자위원회CICR, Comité international de la Croix-Rouge, the International Committee of the Red Cross의 원칙에 입각하여 정식 재조직하였다. 이관용은 제네바에 있는 국제적십자사위원회 사무총장 고티M. Paul Des Gouttes에게 일제가 한국민을 무력으로 탄압하였음을 알렸다.
영국 런던 한국친우회 결성지
영국은 인류 최초로 산업 혁명을 일으키며 세계를 호령하던 강대국이었다. 또한 대한민국에서 독립운동을 펼친 최초의 지역이기도 하다. 영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은 주영한국공사 이한응이다. 대한제국의 주영공사서리였던 이한응은 일제에 의해 국권이 상실될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영국을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다. 이후 3・1운동이 발발하면서 영국 지역에서도 한국의 독립 문제를 표명하기 시작하였다. 그중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는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이라는 책에서 일본의 강압정책과 만행을 고발하면서 한국의 독립 문제는 영국 사회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후 맥켄지는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파리위원부의 서기인 황기환이 참석하였다.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개최지
유럽 내 독립운동 사적지는 앞서 소개한 지역 외에도 다양한데, 한국특사의 외교 활동으로 유명한 헤이그도 한국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이상설, 이준, 이위종이 대한제국 특파위원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을사늑약의 무효 파기와 일제의 침략상을 알려 열강의 도움을 받아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비록 일제의 방해로 회의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헤이그 특사는 일제의 침략과 한국의 요구를 각국 대표에게 알려 한국 문제를 국제정치 문제로 주목시켰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파리위원부는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개최된 국제연맹 사회단체연합회 제4차 대회에 윤해와 이관용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국의 독립과 국제연맹 가입을 위한 청원서를 만들어 10월 12일 대회의장 루피니 상원의원에게 전달하였다. 이들의 노력에 힘입어 1921년 6월 제네바에서 열렸던 같은 대회에서 한국 문제가 토의되어 각국의 동정을 얻을 수 있었다. 당시 회의 집회 장소는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이었으며, 뒤이어 회의가 진행된 장소는 유명한 두오모Duomo 대성당과 이웃해 있는 ‘팔라초 레알레Palazzo Reale’로 확인된다.
독일은 일제강점기 당시 유럽 지역에서 가장 많은 한국인 학생들이 유학하던 곳이었다. 독일에서 유학하는 한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1921년 1월 1일 베를린에서 유럽 최초의 유학생 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 또는 獨逸留學高麗學友會를 결성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의 사무실은 칸트슈트라세Kantstraße 122번지였고, 자신들의 기관지로 『회보Heba』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의 소식을 알렸다. 회원들은 대부분 고학으로 학업을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생 상호간의 구제활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지원 및 대외선전활동, 유럽에서 개최되는 민간차원의 국제대회 참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이탈리아 밀라노 국제연맹 사회단체연합회 제4차 대회장
독일 베를린 유덕고려학우회 터
대한민국과 유럽은 지리적으로 멀기에 역사적 관계가 없을 것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유럽과 한국의 관계를 독립운동 측면에서 보았을 때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근대사회로 진입한 이후부터 유럽에는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분위기가 있었는데, 한국 독립운동에는 이런 자유와 정의라는 보편적 가치가 내재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런 가치관의 동일함이 한국이 유럽 내에서 왕성한 독립 활동을 할 수 있는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