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에서 온 소식
『독립신문』이 전하는 조소앙의 유럽 체류 독립 외교 활동
— 글. 신용옥(前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조소앙은 독립과 건국의 방책으로 삼균주의를 제창하고 1941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위원회 명의로 공포되었던 ‘대한민국 건국강령’을 기초한 독립운동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1919년 6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유럽과 러시아에 머물며 독립 외교 활동을 펼쳤고, 제1차 세계대전 직후 격변하던 세계정세와 사상 조류를 경험했다.
그의 유럽 체류 독립 외교 활동은 당시에도 『독립신문』 제23호(1919. 10. 28.)와 제120호(1922. 2. 20.)를 통해 소개되었는데, 최근 새로운 자료들이 발굴되고 연구되면서 날짜나 내용 등 신문 기사의 부정확한 부분을 보정하고 그 의미를 좀 더 풍부하게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에서는 그러한 자료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해당 기사들의 내용을 재구성하고 그 의미를 소개하고자 한다.
역사학자 홉스봄Eric Hobsbawm은 20세기 전반기, 구체적으로 제1차 세계대전 발발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까지를 ‘파국의 시대’라 이름 지었다. 물론 이런 명명은 자본주의적 경제구조 위에 자유주의적 입헌 구조를 세우고 부르주아의 계급 헤게모니 이미지가 특징적이었던 19세기 서구 문명의 관점에서 걸맞은 것이다.
19세기 서구의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는 세계 곳곳에 침투했고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복종시키며 단일한 보편적 세계경제를 만들어냈다. 그 과정에서 조선은, 그리고 대한제국은 자주적 근대화에 실패하면서 주변 열강에 시달리다 서구 문명을 뒤쫓아 가던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다. 19세기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파국’을 초래한 한 원인이기도 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도 ‘파국’의 파동은 격렬하게 요동치며 사회주의를 비롯해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대안들이 분화해 갔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촉발된 ‘파국’의 파동은 식민지 조선에서 3·1운동의 물결로 고조되었으며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1904년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일본으로 유학 갔던 조소앙은 ‘한일병합조약’ 이후 상하이로 망명하여 1917년에는 ‘대동단결의 선언’에 참여해 선언문을 기초했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했으며 곧이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4월 10~11일 상하이에서 임시의정원 제1회 회의가 개최되었는데, 조소앙의 제안으로 회의 명칭이 임시의정원으로 정해졌다. 이때 조소앙은 대한민국 임시헌장 및 임시의정원법 기초위원으로 활동했으며, 국무원 비서장에 당선되었다가, 4월 22일 제2회 회의에서 관제 변경에 따라 국무원 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조소앙은 1919년 5월 상하이를 떠나 유럽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1921년 5월 중국 베이징에 도착해 12월 하순경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러한 조소앙의 여정은 『독립신문』 제120호에 상세히 소개되었다. 이 기사는 조소앙이 유럽 외교의 중임을 지고 떠났으며 파리에 체류하던 김규식을 만난 것으로 전했는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한국 독립을 요구하기 위해 신한청년당 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을 지원하는 것도 그가 유럽으로 간 목적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면서 임시정부는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파리위원부 대표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파리로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상하이를 떠난 조소앙이 영국을 거쳐 파리에 도착한 때는 1919년 6월 그믐이어서 이런 소기의 목적은 이룰 수 없었다. 한국 문제는 논의조차 되지 않은 채 파리강화회의는 6월 28일 베르사유조약이 체결되면서 사실상 종결되었다.
『독립신문』 23호 1면(1919. 10. 28.)
파리강화회의에서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조소앙과 파리위원부 부위원장 이관용은 1919년 8월 6일 국제사회주의대회(혹은 만국사회당대회)가 열리고 있던 스위스 루체른에 도착해 대회에 참석했다. 이런 사실은 『독립신문』 제23호에 소개되었다.
조소앙은 국제사회주의대회가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파리위원부 대표 김규식과 협의해 대회에 참가하기로 결정했다. 1919년 7월 17일 대회에 참석해 발언할 수 있기를 요청하는 편지를 조소앙과 이관용 공동명의로 대회 의장에게 보냈는데, 2년 전인 1917년에 조선사회당 명의로 스톡홀름 회의에 공함을 보낸 사실도 언급했다. 이에 대회 비서장 휘스만Camille Huysmans은 대회 참석을 환영한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이 편지에서 언급한 1917년에 보낸 공함은 1917년 7월 ‘대동단결의 선언’이 발표된 직후인 8월 29일 신규식과 조소앙 등 동제사 인사들이 상하이에서 개최한 망국기념회에서 결의한 데 따른 것이었다. 1917년 공함의 내용은 중립국인 벨기에를 구제한다면 중립국인 한국을 부숴버린 일본도 징벌할 것, 한국 독립을 평화회의에서 승인하게 할 것, 국제재판소를 두어 국제간 불법 무도를 감시하게 할 것, 동양 사회당과 서양 사회당이 연합해 세계혁명을 함께 일으킬 것, 우리가 완전히 독립하면 우리나라는 만국 동지자의 정책을 특별히 환영할 것 등이었다.
루체른 대회에서 조소앙과 이관용이 8월 8일 제출한 「한국독립승인결의요구안」은 25개 참가국 대표의 협의를 거쳐 8월 9일에 가결되었다. 이들이 제출한 결의요구안에 의하면, 파리강화회의에서 윌슨의 약속이 하나도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에 피압박 민족들은 사회주의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으며, 새로 구성된 한국 정부는 볼셰비즘과 다른, 사회주의 사상과 핵심적으로 일치하는 정책을 공포했다고 했다. 말미에는 대회 결의문에 포함되기를 바라는 내용을 명시했는데, 그 결과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고 한국의 국제연맹 가입을 촉구하는 대회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하지만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인민의 합법적 대표로 구성된 의회가 선택한 한국 인민의 합법정부’라는 문구는 결의요구안에는 있었지만 대회 결의문에는 명시적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1920년 3월 23일 조소앙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 집행위원회 회의Congrès du Comité Exécutif Socialiste International에 참석했다. 이 회의에서 조소앙은 10개의 참가국 대표들이 루체른에서 통과된 한국 문제를 가지고 각기 본국으로 돌아가 국회에서 통과시키고 이 문제를 국제연맹에 제출하도록 한다는 「한국독립문제실행요구안」을 제출해 영국과 벨기에 대표의 지원으로 이를 통과시켰다.
『독립신문』 120호 2면(1922.2.20.)
『독립신문』 62호 2면(1920.4.8.)
이런 사실은 『독립신문』 제120호에 소개되었는데, 연도와 날짜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어 오기로 보인다. 또한 이 기사는 조소앙이 노동사회개진당 대표로 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파리위원부에서 발행한 잡지 『자유한국』 제1호(1920. 5.)는 한국사회당 대표로 참석했다고 밝히고 있다. 노동사회개진당은 1919년 12월 이살음, 이순기 등이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결성한 것인데, 조소앙은 김규식과 협의하여 미주 지역 이살음과 국민회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따라서 조소앙과 노동사회개진당의 연결성은 확실하지만, 한국사회당과 노동사회개진당의 관계가 무엇인지는 분명치 않다.
로테르담 회의의 결의에 따라 국제사회주의 본부는 1920년 4월 대한민국 정부의 성립과 대한민국이 독립국임을 승인하도록 국제연맹과 열강에게 요구했는데, 이런 사실은 『독립신문』 제62호(1920. 4. 8.)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조소앙이 파리위원부에 전문으로 알려온 로테르담 집행위원회 회의의 결의 내용은 세계 연방과 모든 열강 대국에 한국민과 한국의 독립을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는 것이어서 (『자유한국』 제1호), 신문 기사의 내용처럼 국제사회주의 본부가 대한민국 정부 성립의 승인을 요구했는지는 좀 더 밝혀보아야 할 부분이다.
『독립신문』 제120호가 전하듯이, 이후 조소앙은 런던과 파리를 오가며 영국 노동당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친한파 인사인 맥켄지F.A. McKenzie와 협의해 대정부 질의원고를 작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규식과 이관용이 떠난 후 파리위원부를 맡고 있던 황기환, 윤해, 고창일 등과 협의했다. 질의원고의 내용은 1919년 7월이 만기인 한영통상조약에 대한 정부의 의견, 제암리 학살사건에 대한 정부의 태도, 민족자결에 의한 한인의 정당한 행동을 일인이 불법으로 대함을 정부가 묵인하는 이유, 한국의 국제연맹 가입에 대한 정부의 의견 등이었는데, 당시 일본과 동맹관계에 있던 영국 정부의 태도를 추궁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1920년 4월 27일 영국 하원의 대정부 질의에서 한국의 국제연맹 가입 문제와 일본의 통치 문제에 관한 질의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이후 조소앙은 영국을 떠나 덴마크, 단치히,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등지를 경유해 1920년 10월경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해 러시아 각지를 시찰한 후, 1921년 3월 초 모스크바에서 공산당총회를 참관하고 이르쿠츠크와 치타를 거쳐 5월 베이징에 도착했다.
조소앙과 이관용이 참석한 루체른의 국제사회주의대회는 1919년 2월 스위스 베른에서 열린 인터내셔널 회의의 상임위원회 회의였다. 베른 회의는 1918년 3월에 열린 연합국노동자・사회주의자회의에서 구성된 위원회가 제2인터내셔널 국제사회주의국 비서 휘스만과 함께 활동한 결과 소집되었다. 베른 회의에서는 새로운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아래 집행부를 두었다. 상임위원회는 1919년 4월, 8월, 12월에 회의를 개최했는데, 8월 회의가 루체른에서 열렸다.
베른 회의는 모든 국가의 사회주의자들이 동의할 수 있는 평화 조건을 마련하고 인터내셔널을 재건하기 위해 중립국 사회주의 정당들이 1915년 1월에 개최한 회의에서 유래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일어나자, 네덜란드-스칸디나비아 위원회가 만들어져 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주의자회의를 개최하고자 했으며 러시아 멘셰비키의 참여로 위원회가 확대되기도 했으나, 10월 혁명으로 볼셰비키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스톡홀름 구상은 실현되지 못했다. 1917년 조선사회당 명의로 스톡홀름 회의에 공함을 보낸 배경에는 이러한 국제적 상황이 있었다.
조소앙의 유럽 체류 독립 외교 활동은 그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영국 노동당 인사 등 그가 유럽에서 교류했던 사회주의자들은 볼셰비즘에 반대하는 우파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또한 베른 회의의 결과물이었던 1920년 제네바대회는 중립국 사회주의자의 지지를 받은 영국・독일 우파 사회주의자들의 대회였으며, 사회주의 우파의 개량주의 철학을 구현한 결의안들이 통과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향들뿐 아니라, 여행 과정에서 알게 된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형식에 사회주의적 헌법정신을 지닌 발틱 국가들의 신헌법도 조소앙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