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이곳 유럽,대한민국 임시정부 사람들
— 글. 이계형(국민대학교 교양대학 교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이 중심이었던 만주·연해주와는 달리, 유럽에서는 외교 활동이 중심이 되었다. 당시 유럽은 국제정치의 중심지이자 표현의 자유와 정보 접근성이 보장된 공간으로, 외교 선전과 국제 여론전을 펼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내 독립 외교 활동의 첫 사례는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된 제2차 만국평화회의였다. 당시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이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아쉽게도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유럽 내에서 본격적인 독립운동 활동은 1919년 파리강회회의에 김규식이 파견되면서 시작되었고 그 뒤로는 조소앙, 황기환, 서영해 등 유럽에서 활동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들의 외교 투쟁은 국제사회의 인정을 얻기 위한 언어의 싸움이자, 끈질긴 설득의 역사였다.
파리강화회의 당시 김규식
『통신전Circulaire』 20호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전권대표로 파견된 김규식은 유럽 외교 무대에서의 독립운동 외교의 포문을 열었다. 그는 영어·프랑스어·독일어 등 6개 국어에 능통한 유학파 출신이자,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큰 기대를 걸었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부터 외무총장 겸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로 공식 위임을 받아, 국제무대에서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고자 다양한 전략을 구상했다. 그는 ‘한국대표부Korean Commission to the Peace Conference’와 ‘한국통신국Korean Information Bureau’을 설치하고, 외신 기자들과 접촉하거나 언론에 글을 기고하는가 하면, 각국 대표단에 외교 서한·청원서 등을 보내는 등 다양한 형태의 외교 활동을 펼쳤다. 특히 그는 불어·영어로 선전지 『통신전Circulaire』을 발행하여 일제 식민 지배의 현실과 3·1운동을 통한 한인들의 민족적 열망을 부각하여 유럽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반발을 의식한 파리강화회의 측이 한국대표단의 공식 참가를 거부하는 바람에 독립 청원이 정식 안건으로 상정되지 않았다. 김규식은 회의장에 입장하지 못했지만, 회의장 밖에서 외교 활동을 펼쳐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제기한 인물로 평가 받고 있다.
한편, 외교 활동을 확대하고자 했던 김규식의 요청에 여러 독립운동가가 파리에 집결했다. 1919년 5월 초순, 상하이에서 김탕이, 5월 18일에는 스위스 취리히에 유학 중이던 이관용이 파리에 도착했으며, 6월 3일에는 미국군 지원병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독일에 체류 중이던 황기환이 합류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식 외교 사절로 파견된 여운홍도 파리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파리 한국대표부가 조직되어 김규식을 위원장, 이관용을 부위원장, 황기환을 서기장으로 하는 정식 체제를 갖추었다. 조소앙은 파리강화회의가 끝난 뒤 파리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유럽 각국의 외교 사절이나 언론과 지속해서 접촉을 시도하며,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요청하는 외교전을 이어갔다.
이후 김규식은 활동 무대를 미국으로 옮겨 조선인 동포 사회와 외국 언론 및 기독교계 인사들과의 연대를 도모하는가 하면, 한인대표자회의에 영향력을 끼치는 등 독립운동의 국제적 기반 마련에 지속적으로 기여하였다.
조소앙
조소앙은 유럽 사회주의 진영과 국제정치 이념에 정통한 외교 활동가이자 사상가였다. 그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1913년 8월경 상하이로 망명하였는데, 1917년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국제사회당대회에 한국 문제를 의제로 제기하는데 노력하였다. 그는 1919년 2월경 길림으로 건너가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하여 부주석으로 활동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후 그는 다시금 상하이로 돌아와 임시정부를 수립하였으며, 김규식의 외교 활동을 지원하고자 파리로 이동하여 임시정부의 유럽 외교 전략 구축에 본격 참여하였다.
이관용은 한국인 최초로 유럽에서 서양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친일반민족행위자인 아버지 이재곤과 정반대로 독립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그는 1916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서 유학 중, 1919년 5월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김규식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국대표부를 만들어 부위원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는 유럽 언론과 외교 관계자들을 상대로 한국 독립의 정당성과 일본 식민 지배의 부당성을 국제법과 철학 논리를 바탕으로 설득하는 데 주력했다.
한국대표부가 파리강화회의를 통한 외교적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조소앙과 이관용은 1919년 8월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국제사회주의대회International Socialist Conference: 일명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독립승인결의요구안」을 제출하였다.
결의요구안에는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과 인도주의 이상을 기반으로, 한국의 독립을 국제사회가 지지해야 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대회 측은 한국 대표단의 주장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결의서를 채택하였다. 이는 유럽 내 사회주의 진영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정한 외교적 성과를 거뒀다는데 의미가 컸다. 비록 열강의 정치적 의사결정 구조하에서 우리의 입장을 관철하지 못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임시정부가 ‘국제적 연대의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성과로 꼽힌다.
이후 조소앙은 사상가로서뿐 아니라 외교 실천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였으며, 이후에도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중심으로 한 민족자결과 국제연대의 외교 노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독립기념관
이관용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제출 서신(영문, 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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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환
『구주의 우리 사업』 표지
황기환은 서유럽 외교 무대에서 중심인물은 아니었지만, 대중 외교·정보전·출판·연대 조직 활동 등을 통해 한국 독립운동 외교의 다층적 기반을 다진 실무 외교가이자 전략가였다. 김규식이 1919년 하반기에 국제연맹 창설 논의가 본격화하던 미국으로 외교 무대를 옮긴 뒤, 파리 한국대표부의 실질적 운영은 홀로 남게 된 황기환이 맡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어에 능통하지는 않았지만, 현지 지식인 및 지한파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파리 내 여론을 상대로 외교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는 한국대표부를 ‘파리위원부Korean Commission in Paris’로 재편하고, 김규식 시기의 공식 외교 활동보다 더 대중적이고 실무적인 홍보 활동 중심으로 단체를 이끌었다.
그는 한국과 관련한 유럽 언론의 오보에 신속히 대응하고, 언론과의 인터뷰·기사 기고, 자료 배포를 통해 일제의 탄압 상황과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비록 국제조약 체계 안에 직접 진입하지는 못했지만, 유럽 지식사회와 민간 부문을 통한 ‘우회적 공공외교’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20년, 황기환은 활동 거점을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 런던으로 옮기고는 보다 폭넓은 연대 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곳에서 그는 ‘대영제국 한국친우회Friends of Korea in the British Empire’를 창립, 영국 내 진보적 인사 및 반제국주의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한국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 이듬해에는 파리에도 유사한 단체를 설립해, 친한 인사들과의 국제 연대를 조직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유럽 활동을 총정리한 저술인 『구주의 우리 사업』을 간행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유럽 외교 활동의 경과, 전략, 성과와 한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이 책은 당대 유럽 내 한국 독립운동 기록 중 가장 종합적인 민간 보고서로 평가받고 있으며, 향후 해외 독립운동사의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1923년, 황기환은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 군축회의 여파에 대응하고, 미주 한인사회와 임시정부의 연대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뉴욕에서 지병이 악화하여 젊은 나이에 순국하여 그의 활동은 아쉽게도 끝을 맺게 되었다.
1920년대 중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파리를 거점으로 한 유럽 외교 활동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적임자로 서영해를 선발하였다. 그는 1919년 4월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김규식의 권유로 1920년 12월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언론학교와 고등사회연구학교EHESS에서 유학하며 유럽 사회와 국제 정치를 익혔다.
이후 서영해는 1929년 ‘고려통신사Korean Press Bureau’를 설립하고 독립운동 외교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그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한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홍보물을 직접 저술·배포하는가 하면, 국제회의 참석·언론 기고 등을 통해 한국의 현실과 독립의 당위성을 알렸다.
특히, 그는 1932년 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 측의 언론 왜곡과 압박에 악화된 유럽 여론을 수습하고, 체포된 한인들의 석방을 위해 애섰다. 이듬해인 1933년에는 임시정부의 특명전권 수석대표 자격으로 제네바 국제연맹 총회에 참석한 이승만을 도왔다. 프랑스어에 능통했던 서영해는 제네바에서 중국 대표단과 연대를 도모하고 유럽 언론인들과 접촉하는가 하면, 홍보자료를 배포하는 등 회의장 밖에서 선전 활동 등을 펼쳐 임시정부의 존재와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설득하려 했다.
1936년 서영해는 임시정부로부터 ‘주법특파위원駐法特派委員’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와 스위스를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국제 인지도를 높였다. 특히 그는 유력 언론인들을 상대로 정기적으로 브리핑을 하고 문서를 배포하여 임시정부가 단순한 망명조직이 아니라 정치적 주체임을 강조하였다. 비록 그의 활동은 공식 외교로는 인정받지 못했지만, 임시정부의 국제적 존재감을 확장하고 한국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알리는 데 큰 기여를 했다.
서영해
ⓒ독립기념관
『어느 한국인의 삶』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유럽 외교는 무장투쟁이 아닌, 말과 글로 싸운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언론과의 접촉, 외교 문서 작성, 국제회의 참석, 우방 결성 등 다양한 전략을 통해 ‘대한민국’이라는 존재를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은, 공식적인 승인이라는 결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국제사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유럽의 지식인과 시민 사회는 점차 이들의 정당성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임시정부는 언어의 힘으로 존재를 증명했다. “그들은 외면당해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독립이었다.” 유럽에서의 외교는 바로 그런 외면을 견디는 힘, 독립을 향한 설득의 여정이었다.
스위스 루체른 국제사회주의대회 결의문
ⓒ독립기념관
국제사회주의대회 한국 독립지지 결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