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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파리강화회의,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다

특집

파리강화회의,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다

— 글. 전상숙(광운대학교 동아시아연구소 연구교수)


ⓒUniversal History Archive

파리강화회의 개회식(1919. 1.)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한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미국의 정상들(1919. 5. 27.)

파리강화회의의 안과 밖

파리강화회의는 산업 혁명 이래 최초의 총력전이 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것이었다. 유럽에서 일어난 전쟁과 직접 관련된 문제해결이 목적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간 지역 분쟁이 유럽 전쟁으로, 미・일의 참전으로 세계대전으로 전화된 것이었다. 핵심은 유럽을 중심으로 한 열강들의 세력다툼이었다. 이 사실은 열강의 지배자들에게 분명했다. 따라서 회의 의제는 그에 충실히 채택되었다. 회의는 전쟁의 주요 이해 당사국들의 이권이 집중된 유럽과 직접 관련된 국가의 영토에 집중되었다. 그런데 이와는 다르게, 파리강화회의에는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약소민족들 일반의 독립에 대한 기대와 관심이 집중되었다. 회의의 기본 원칙이 된 미국 대통령 윌슨의 ‘14개조 선언’에 민족자결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선언은 세계대전 중에 연합국 측의 필요에서 나온 정치적 약속과 같았으므로 거기서 식민지・약소민족들은 독립의 서광을 발견했던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윌슨의 14개조가 회의 준거로 채택될 때 민족자결 조항에서 식민지 일반의 자결문제는 제외되었다. 이때 한국을 비롯한 식민지・종속국에서 민족자결선언이 광범위하게 영향력을 발휘하며 독립에 대한 기대가 고조되고 있었다.

파리강화회의의 ‘민족자결’과 약소민족의 독립운동, 자결권

파리강화회의의 원칙이 된 윌슨의 14개조 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 측의 승리로 이끌어 회의를 주도한 미국이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이상주의적 이데올로기 아래 경제적 실세를 국제정치에 반영하고자 한 세계전략의 한 형태였다. 따라서 전후 체제를 둘러싼 전승국들 사이에 첨예한 이해 갈등과 강화회의에 기대를 건 식민지・종속국들의 좌절과 갈등이 뒤따랐다.
한편,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연합국과 추축국 모두에게 위기의식을 갖게 해 종전을 촉진했다. 전쟁으로 지친 유럽에서 반제국주의・노동운동이 고양되고 식민지 민족운동이 활성화되었다. 특히 혁명 직후 볼셰비키 정부가 민족자결을 선언하고 이를 제정러시아 시기에 복속한 민족들에게 실천한 것은, 식민지・약소민족들의 광범한 지지를 획득하는 동시에 윤리적으로 제국주의 전쟁 중인 자본주의 열강보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우월하다는 인식을 주었다.
그에 대하여 미국 대통령 윌슨은 전쟁 목적의 도덕성을 증명해야 할 필요에서 14개조 선언을 제창했던 것이다. 윌슨은 볼셰비키 정부의 선언과 같이 종래의 비밀 외교와 세력 균형에 의한 세계 분할을 부정하고, 무배상・무병합의 민족자결을 선언했다. 이것이 식민지 민족의 자결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윌슨의 선언은 그의 이상주의가 결합한 막연한 조항으로 이루어진 선언적인 것으로, 유럽의 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열강들은 전쟁도 불사한 제국주의적 욕망과 식민지를 통해서 이미 획득한 이권의 상실을 원치 않았다. 윌슨은 제5항 민족자결에 대한 조문 해석을 통해서 연합국들의 영토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켜서 파리강화회의로 전쟁을 종결하고 국제연맹을 결성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강화회의의 기초를 논하는 회담에서 식민지 민족자결 문제는 전승국과 직접 관련된 곳에 국한된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식민지·약소민족 대표들의 회의 참가도 원천 봉쇄되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를 통해서 윌슨의 민족자결 선언이 빚은 광범한 반향은 역사적 전환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식민지 조선에서 3・1 민족독립운동이 발화되어 ‘대한’ 민족의 자결과 독립을 대내외적으로 선언하고 독립운동을 적극화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민족’의 이름으로 ‘조선인(조선민족)’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근대적인 대한 독립국가의 수립 의지를 천명한 거족적인 민족주의가 발현되었다. 이는 국제 정세 변화에 대응한 외교적 독립운동의 필요로 이어져 독립 민족국가를 정치적으로 실현하기 위한 정부적 지도기관이 결성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근대적인 민족 독립국가를 상정한 통합 지도기관으로 수립되었다.
또한, 강화회의를 통해서 고양된 비서구・식민지・약소민족의 자결권에 대한 기대는 결과적으로 열강들이 자신들에게 국한되었던 민족적 자결권, 평등한 국민국가 단위로 병존하는 국제법 체제의 문제를 비서구 식민지・약소민족의 자결에 대해서까지 고려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식민지・약소민족들도 근대 국제법 체제와 국제사회에서 통용되는 자결권의 문제를 분명히 인지하여 반제국주의 독립운동을 본격화하게 되었다.


ⓒ독립기념관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한 13개조

국제사회를 향한 한국의 독립 호소

민족 독립이 한국인들의 관건이던 당시 우리 지도자들은 윌슨의 14개조 선언에서 독립으로 나아갈 희망을 발견하고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여 열강에 독립을 청원하고 지원을 얻고자 했다. 민족자결이 논의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기대하는 것은 국내외 각계각층을 막론했다. 각지에 산재해 있던 민족 지도자들은 대표를 파견해 독립 문제가 강화회의를 통해서 타결되도록 노력했다.
1918년 10월 미국의 대한인국민회는 이승만·정한경·민찬호를 대표로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던 여운형은, 1918년 11월 휴전 성립 후 중국에 미국의 입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특파된 찰스 크레인Charles Crane에게 독립 지원 의사를 듣고 장덕수와 함께 윌슨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한국 독립에 관한 요망서’를 작성해 전달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과 신한청년단을 결성하여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에 파견했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도 5개항의 결의안을 채택하고 김규식을 강화대사로 임명했고 한인신문 발행자 윤해와 고창일을 파리로 파견했다. 국내의 유림대표들도 ‘파리장서’를 작성하여 파리의 김규식에게 강화회의에 제출하게 했다.
1919년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한국공보국을 설치하고 스위스에서 온 이관용, 상하이에서 온 김탕, 미군 출신으로 독일에서 온 황기환·조소앙·여운홍 등과 『통신전 Circulaire』을 출간하고 강화회의에 제출할 ‘한국 독립 탄원서’와 ‘한국 민족의 주장’을 작성했다. 그는 파리로 향한 후, 4월 11일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정부의 대표로 임명되었다. 전 민족의 독립과 대한민국의 염원을 대표한 김규식은 일본의 한국 침략과 학정을 논박하는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인쇄물을 만들어 배포하고, 취재차 온 각국 기자들과 대표들에게 적극적으로 ‘한국 독립을 위한 외교’를 전개했다. 임시정부는 파리강화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부각해서 국제연맹을 통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얻고자 했다. 이 밖에도 국내외 민족지도자들은 한국의 실상을 대외적으로 알리고 독립을 호소하여 파리강화회의를 통해서 한국 독립 문제가 타결되기를 기원했다.


©독립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1920. 1. 1.)


ⓒ독립기념관

파리 한국대표단이 파리강화회의에
보낸 독립청원서(1919. 4.)

파리강화회의로 각성된 국가적 외교와 연대의 필요

한국의 독립청원 호소는 일본의 오랜 외교교섭과 연동된 열강의 이권 관계 및 냉정한 국제정치 속에서 성과를 이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미국은 일본과 외교관계를 이유로 비자발급을 거부해 대한인국민회의 이승만과 정한경은 출국조차 못 했다. 파리로 간 민족 대표들은 일본의 방해와 열강의 소극적인 태도로 회의장에 들어갈 수조차 없었고 파리강화회의는 종결되었다.
반면에 일본은 전승국의 일원으로 강화회의 10인 위원회에 참석해서 의제 설정과 전후 처리방식에 자국의 이익을 적극 반영했다.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을 “다이쇼 새 시대에 하늘이 돕는다”라고 보고 열강이 유럽에서 전쟁 중일 때 만주와 몽고의 이익을 확보하고 중국에서 세력권을 확대하고자 했다. 영국의 반대에도 전면적 참전을 선언하고 외교적 노력과 정치적 협상에 주력했다. 중국과 21개조 요구에 의거한 조약, 종전 후 강화회의에 참가하기 위한 런던선언 참여, 러일협약, 독·영·러·프 4개국 및 미국과 강화회의 시 일본의 중국 이권을 지지한다는 비밀 협약 등을 체결했다. 전후 처리의 상징적 원칙이 된 세계평화와 민주주의라는 윌슨의 이상주의 정책을 활용한 일본은 전승국의 일원으로서 지분과 위치를 인정받았다. 조선의 식민화는 공고해졌다.
그렇지만 파리강화회의에서 민족 대표들의 외교 활동은, 평화회의 사무총장 두사타Dusata와 화이트White로부터 한국 문제가 곧 창설될 국제연맹에 제기되어야 할 것이라는 답신을 받아내고, 파리의 일부 신문에 한국에 대한 동정 기사가 게재되는 등 국제문제로 부각되는 계기가 되었다. 부수적인 성과는 강화회의를 통한 독립 청원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 기구와 외교 활동을 통한 국제적인 임시정부 승인의 필요 등을 자각하고 실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제2차 세계대전 종결 시 한국 문제가 국제적으로 논의되는 중요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다. 파리강화회의에서의 한국 독립 호소는 오늘날 우리의 국제 정세 인식과 외교 활동을 되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